직무에 임해 선구자적 자부로 일관|창립50돌 맞는 대한간호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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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전문직 여성단체로서 단단하게 성장해 온 대한간호협회가 17일로 창립 50도을 맞았다. 1923년 50명이 모여「조선간호부회」를 조직한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 6천명의 회원으로 불어난 대한간호협회는 50돌 기념「슬로건」을「새시대를 향한 간호」로 설정, 새로운 직업관으로의 탐색을 시작했다.
1903년 정동에「부속학교」세워져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원 교육기관은 1903년 미국선교사들이 서울 정동에 세웠던 병원 부설기관으로 탄생되었다. 그 당시 여성들의 교육수준은 황무지에 가까왔으므로 이 간호부양성소는 교육기간을 6년으로 잡을 수 밖에 없었다. 1908년에는 김마다, 이 그레이스 2명이 첫 졸업생으로 배출되었다.
보구여관간호부양성소에 이어 서울의 세브란스병윈과 서대문부인벙윈, 그리고 평양부인병원 안에서 간호부 양성소가 생겨났다. 1923년에는 이들 졸업생이 50명이나 모여 조선간호부회를 조직할 만큼 숫가가 늘어났다.
그 당시의 간호부양성소들은 기숙사비, 책값까지 부담했으나 간호부 지망생들은 적었다. 아직도 환자에 대한 봉사업무를 사회는 이해하지 못했고 이것을 천시하는 경향도 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간호부가 되려고 결심한 여성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고 선구자적인 자부심이 강했다. 3·1운동 때 동대문병원 지하실에 동사기를 숨겨들여가 밤새 인쇄물을 찍 어낸 것도 우리들이었다』고 1919년 세브란스양성소를 졸업했던 이효경할머니는 회상한다.
모회의 천친남조 바로잡는데 긍지를 갖고 오는 139년에 벌써 「캐나다」의 국제회의에 이효경씨 등 2명의 대표를 파견했었고 B년에는 대한간호협회로 이름을 바꾼 후 「대한간호」회지를 창간했다.
이러한 적극성, 그리고 사회의 천시풍조를 바로 잡아가는 자부심은 우리나라의 간호헙회 50년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정부 수립 후 간호사업을 전담하는 기구가 폐지되려고 했을 때 이들은 힘을 모아 이 안을 철회시켰고 68년에는 간호직 수당을 법제화하는데 성공했다.
69년 의사의 지시로 주사를 놓았던 부산의 김영자간호윈이 그 환자의 사망으로 구속되자 전국의 간호원들은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일사불란한 단결력을 과시했었다. 간호교육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중졸이상을 받아들이던 간호기술학교를 고졸이상만이 입학할 수 있는 간호전문학교로 개편시킨 이면에도 이들의 기나긴 노력이 있었다.
71년대부터 해외로 현재 7천여명 진출 간호 직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서독을 비롯, 미국·「캐나다」등지에 대량으로 취업의 길이 트이면서 이 직종은 외화 획득의 숨겨졌던 보고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간호보조원을 포함한 우리나라 간호요원의 해외진출은 72년 말 현재 7천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들이 71년에 별어들인 외화는 무역수출 실적의 1할이나 되는 액수였다.
이들은 1900년대 초에 우리나라 여성사회에서 담당했던 선구자적 역할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여성사회에서도 상당한 의식의 변화를 일으켜 가고 있다. 이들은 한가정 가정의 가계를 리드해 가는 사람으로서의 발언권을 높여가고 있으며 좀더 나아가서는 사회에 대한 여성의 발언권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있다.
간호협회는 정부수립이후에 손옥순·이경애·김은순·이금전· 이영복· 홍신영· 전산초씨 등 7명의 회장을 맞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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