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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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런던」의 어느 관광「코스」에도 으례 끼이는 명소로서 「웨스트민스터」사원이 있다.
영국 사람들이 이곳을 그만큼 자랑으로 삼는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이 사원에는 몇 만장의 유리로 색채 무늬를 이룬 「스탠드·글라스」가 있다. 햇볕이라도 받는 날이면 이 색채 무늬 유리가 이를 데 없이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준다.
관광 「가이드」는 영국인 특유의 억양으로, 그러나 조금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전쟁 중엔 이 「스탠드·글라스」를 모두 떼어 안전한 곳으로 속개시켜 간직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맘속으로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있는지는 얼굴에 완연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 유리 조각들을 어떻게 떼어 냈는지, 생각만 해도 입이 벌어진다.
『피와 땀과 눈물』로 고난을 이겨 나가자고 「처칠」이 외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매일처럼 있는 독일기의 공습 속에서 아마 한장 한장에 정성스레 번호를 메기고, 곱게 포장을 하면서 「런던」의 시민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전쟁이 끝나자 「런던」의 시민들은 다시 또 수만장의 유리를 날라 와서 차곡차곡 제자리에 끼워 나갔다. 그때 그들은 또 얼마나 자랑스럽고 흐뭇했겠는지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이라고 좋은 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월남전 이상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킨 일이 있었다. 「메트러폴리턴」 미술관에 소장되었던 값진 명화 몇 점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난 몇 해 동안에 사들인 명화 몇 점이 가짜였음도 판명되었다.
관장의 변명은 운영난에 허덕이던 동 미술관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을 더욱 분노시키게 한 궁색한 변명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라 망신이라는 비난이 물끓듯했다.
이 두개의 동떨어진 「에피소드」는 고 미술품이란 한 나라의 자랑과 직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훌륭한 미술품이 자기네 조상의 손으로 된 것이라면 더욱 큰 자랑거리가 된다. 그것을 곱게 간직하고 있다면 그 사실 자체가 예술을 아끼는 민족이라는 자랑이 된다.
몇 해 전에 영국의 한 문화재가 공매되어 미국의 부호 손에 넘어갈 뻔했었다. 그러자 그곳 시민들이 추렴을 해서 되찾았다. 영국의 오늘이 그냥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삽화인 것만 같다.
최근에 제주 민속 박물관에 도둑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경주에선 신라 고분이 대량으로 도굴됐다.
텅 빈 미술관 전시장 앞에 서서 덤덤한 표정으로 설명할 어느 날의 관광「가이드」를 상상 해본다. 『여기에는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재가 들어 있었습니다. 또 그것보다 더 훌륭한 고 미술품이 고분 속에 들어 있었으리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이런 소리나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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