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단의 하루>
한해가 가고 새해가 왔다. 1943년1월1일.
아침나절에는 새해첫날이라 그런지 한사람의 동지도 끌려나가지 않았다.
오늘은 웬일이라고 편히 보내게 하려는가하고 숨을 돌리고있는데 간수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더니 모두 연무장으로 데리고 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끼리 정다운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들 수척해져서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이날 따라 형사들도 서로 인사를 나누는 우리들의 행동에 잔소리를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우리를 이제 이렇게 한자리에 모아놓고 또 곤욕을 치르게 할 셈인가?
나는 이상히 생각하여 오랫동안 얼굴을 못 본 이극로와 장지영의 곁으로 가서 안부를 물었다.
이극로와 장지영은 그래도 아직 의기가 살아 있는 듯 꿋꿋해 보였다.
장지영은 별로 말을 안 했지만 입가에 이상한 비웃음을 띠고 일제의 경찰들이 우리에게 하는 수작을 비웃고 있었다.
『어디 저희들 멋대로 해보라고 하지.』
장지영의 싸늘한 비웃음은 혹독한 고문 속에서 더욱 예리하게 빛나는 듯 했다.
오늘은 이렇게 모두 모아놓고 어떤 짓을 할까 궁금히들 여기고 있을 때 난데없는 잔칫상이 떡 벌어지게 들어왔다.
잔칫상을 놓고 우리들 앉힌 다음 형사주임이 말했다.
『오늘은 정월초하루 원단이므로 서장님께서 특별히 당신들을 위해 자리를 베푼 것이니 배불리 먹도록 하시오. 하지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말을 해서는 안되오. 만일 입을 열러 말을 주고받는 자가 있으면 음식도 먹이지 않고 유치장으로 돌려보내겠소. 이 음식들은 당신네들 집에서 보내 온 것이니 많이들 먹고 집에 남아있는 식구들을 위해 빨리 이 사건이 해결되도록 자백들을 하시오.』
결국 음식을 먹여 놓고 또 자백을 강요하는 말투였다.
우리는 그 동안 굶다시피 해온 터라 음식냄새가 코에 들어오니 미칠 것만 같았다.
당장 달려들어 먹고싶은 생각에 침만 꿀꺽이고 있는데 고등계 형사부장 「야스따」(한국이름 안정묵)가 입을 열었다. 『이 떡국과 과일·과자 등 훌륭한 음식은 특별히 서장님의 양해를 얻어 홍원의 친지들이 보내온 거요. 즉 도봉수씨와 이봉수씨, 그리고 최순복이란 여자요.』
이봉수와 도봉수는 그 당시 함흥에서 이름난 부호이며 유지였고 특히 도봉수는 미술가 도상봉의 부친이다.
최순복은 이희승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제자로 함흥에 살면서 이희승을 면회오기도 했었다. 우리들은 아직도 우리를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저 세상 바깥에 있다는 새로운 감상에 목들이 메었다.
형사들은 음식을 처음에는 조금씩 우리들에게 나누어 먹게 했다. 그리고는 『네놈들 한번만 먹지, 두었다가 먹을 수는 없으니 어디 마음껏 먹어보아라』하고 자꾸 가져다주었다. 저희들은 맛난 음식만을 가져다 같이 먹었지만 워낙 음식들이 많아 우리들은 먹고 또 먹었다.
저네들은 또, 『먹고 들어가야지 가지고는 못 들어간다』고 재촉까지 했다.
우리는 굶주린 창자에 집어넣고 또 집어넣었다.
함흥친지들은 역시 음식을 보낼 때 형사들과 간수들이 빼앗을 것을 미리 예상, 그들이 아무리 빼앗는다해도 역시 남아 우리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음식 양을 일부러 많이 해서 보낸 듯했다. 우리 모두는 실컷 먹고는 저녁때가 되어 들어왔다.
이제는 감추는 재주도 늘어 양말 속에, 품속에, 입 양볼 턱 속에 숨길 수 있는데까지 숨겨 가지고 들어왔다.
우리는 숨겨 가지고 들어온 음식을 유치장에 들어와 꺼내어놓으니 제법 소복이 쌓여 내일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되었다.
그 음식을 똥통 밑에 감춰놓고는 제자리에 앉았다.
김윤경이 내게 물었다.
『난생 처음으로 음식을 많이 먹었는데 우리가 보통 얼마나 먹었을까?』
『아마 보통 때 일곱 배는 먹었을 걸.』
이은상이 대답했다.
나도 여기에 빠질리 없다. 너무 먹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밤이 되자 모두 자리에 드러누웠는데 배가 살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내가 똥통을 찾고 이희승이 설사를 하고 김윤경이 참다못해 옆에다 싸고 이은상이 똥통을 빨리 내라고 다급한 소리를 쳤으며 이석린·이병기 모두가 안달을 했다.
우리는 밤새도록 똥통을 번갈아 신세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3호 감방뿐 아니라 다른 방에서도 이러한 소동은 다음날 날이 밝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굶주린 창자에 기름진 음식이 들어가니 감당해 낼 수 없는 것은 뻔한 일.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데도 우리들 모두는 다음날 눈들이 쑥 들어가 더욱 수척해지고 말았다. 【정인승】원단의>
(625)-제자는 정인승|<제29화>조선어학회 사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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