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드라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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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월남정세는 혼미에 혼미만을 거듭하고 있다. 나날의 전황은 절망의 연속뿐이다. 외신의 전장사진은 어느 장면을 보아도 전율과 처절을 자아내지 않는 것이 없다.
파리에서도 역시 혼미는 거듭되고 있다. 끝내 파리 회담은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재회 며칠만의 일이다. 월남은 이제 어디로 가는지 새삼 처연한 생각이 깊어진다.
이런 정황 속에서 5일자 파리발 외신은 주목을 끈다. 파리회담의 비밀 막후에서 미국 측은 티우 월남 대통령의 퇴진을 수락했다는 보도가 나돈다. 같은 날의 워싱턴 발 외신도 그 톤(어조)은 다르지만 파리의 미스터리와 연결된다. 미국이 제의한 월남연정을 월맹 측은 거부했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미국무성은 어느 경우도 모두 부인하고 있다.
결국 파리회담의 무기연기는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게 한다. 하나는 미국과 월맹 사이의 묵계 가능성이다. 미국은 월남전선에서의 열세로 인해 파리 회담에 나서는 입장이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 회담을 진전시키려면 무엇인가 새로운 협상 카드를 제시해야 할 처지이다. 그렇다면 월맹이 끈질기게 요구해온 『티우 정권의 교체』 주장에 어떤 회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종래의 미국 태도는 물론 『노!』였다.
그러나 이 말을 다시 반복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 양자는 묵계를 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파리 회담을 계속 열어놓고 있으면, 외부의 충격에 의해 그 약속이 변질될 수도 있다. 따라서 『무기 결렬』의 인상을 주어 고의로 문을 닫아 놓았는지도 모른다. 전황이 잠시 누그러지는 듯한 기미는 더욱 그런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또 하나의 추측은 비관적인 경우이다. 미국이 파리의 비밀회담에서 제시한 카드가 월맹의 새로운 카드에 의해 제압되었을지도 모른다. 월맹은 최근의 공세로 다소 발언권을 강화했을 것도 같다. 이런 사정들이 워싱턴에 보고되어 닉슨 대통령은 단호히 파리 회담재발의 필요성을 부인했을 것도 같다. 그렇다면 월남 문제는 전략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시 백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중에 어느 추측이 보다 진실과 가까울지는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닉슨 대통령은 오는 21일 모스크바를 방문해야 하는 일정을 갖고 있다. 모스크바에서의 귀국 길은 그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해야 하는 또 하나의 당위가 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닉슨으로서는 최상·최선의 정치 드라머이다. 그의 정치적 운명을 건, 마지막 챌린지이다. 과연 닉슨이 그런 현실에 초연해 있을 수 있을까? 파리 회담이 그 내막에선 상당히 진전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허무한 추측일까? 티우의 망명 설까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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