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상흔 달래며 4년|그날 되새기는 김신조 씨와 최규식 경무관 미망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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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21사태가 일어난 지 4년-. 북괴공비의 한 장본인으로 남파됐다가 생포된 김신조 씨와 기습을 몸으로 막다 순직한 당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씨의 미망인 유정화 씨(39) 에게 해마다 돌아오는 이날은 악몽의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결같이 이날이 오면 악몽을 환기시키는 침략자의 마수를 저주하게 된다.

<최규식 경무관 미망인>종합청사에서 약국경영하며|자라는 자녀에 희망 걸어|의로운 죽음 헛되지 말았으면·
1·21사태 후 4년. 슬픔을 이기고 일어선 고 최규식 경무관 댁은 생활의 기반도 잡히고 자녀들도 성장했다.
미망인 유정화 여사는 종합청사에서 약국을 열었는데 예상외로 번창하여 이제 떳떳한 가장으로서 자녀들을 키우고있다.
그때 2세이던 꼬마는 6세가 되고 1학년이던 큰딸은 6학년이 되어 내년이면 졸업반에 든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아득하기만 했어요』 유 여사는 그때 남편의 뒤를 따라갈 생각도 많았지만 어린것 때문에 굳세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고 이제 약국을 기반으로 생활을 꾸려간다면서 웬만큼 자신도 생겼다고 말했다.
큰딸 용숙 양은 12세로 성심국민학교 5년이고, 민석 군은 경복국민학교 3년(11세) 2녀 희용 양은성심국 2년(9세) 희금 양은 6세다.
애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면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말했다.
1·21직후 실의에 빠져있을 때에는 겹쳐서 밤늦게 장난 같은 전화를 걸어오는 일도 있었고 고인의 명예를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으나 국민들의 한결같은 지원으로 종합청사에서 약국을 연 뒤로는 이 같은 일은 없어져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이러나 고인의 의로운 죽음은 해가 흐르니 차츰 잊혀지는 것 같다면서 애들이 크면 아버지의 일을 잘 알도록 가르치겠다 고도 말했다.
21일 아침 치안국 간부들과 동창들이 같이 자하문 동상을 참배, 화환을 바치고 묵념했고 등창들은 신문회관에서 따로 추모회를 가졌다.
유 여사는 6세 짜리 꼬마가 아버지를 찾을 때 가슴아프다면서 『가실 수 없는 슬픔을 이기고있다』고 말했다.

<고 최규식 경무관 승공추념식 거행>
고 최규식 경무관의 제4회 1·21 승공추념식이 21일 상오10시 서울 신문회관강당에서 미망인 유정화 여사(39) 등 유족과 동료경찰관 예비군 각 반공단체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날 추도회는 고 최경무관의 승공 정신을 되새기고 『북괴는 무모한 남침야욕을 버리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식장에는 자유시민이 된 김신조 씨와 당시 보고산에서 잔비소탕 중 부상, 4년째 원호병원에 입원중인 김영성 일등병(28)이 참석, 승공을 다짐했다.

<김신조 씨>1·21상흔 달래며 4년|아직도 속죄의 마음으로|딸의 재롱 보는 게 꿈같이 여겨지고|대한의 자유 위해 목숨 바칠 결심
l·21사태를 몰고 온 장본인의 한사람이었던 김신조 씨(32·삼부토건 총무과)는 4년 전 그날을 되새기며 얼굴을 붉혔다.
김씨는 그 동안 자유대한의 몸 안에서 직접 살아본 결과 자유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절실히 느낀다면서 그때 일은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이라고 했다.
김씨는 이젠 어엿한 직장인이자 한 가장.
70년4월 삼부토건에 취직, 직장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고6개월 뒤엔 부인 최정화 씨(28) 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 새살림을 차렸다. 1년 뒤엔 첫딸을 낳았다. 이름은 남희. 남쪽에 내려와 삶의 희망을 얻었기 때문에 그 결실인 딸의 이름에 그 뜻을 붙였다고 했다.
김씨는 4년 전 남한의 질서를 파괴하러 침투했던 몸이 이젠 출근해서는 회사원으로서, 퇴근해서는 아빠로서 딸의 재롱을 보는 것이 꼭 꿈만 같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국민에게 지은 죄를 깊으려면 아직도 멀었고 특히 고 최규식 경무관 유족의 안부가 항상 근심스럽다며 송구해했다.
1·21 4주년을 맞아 김씨는 지난19일 약간의 위문품을 마련, 자신이 침투했던 서부전선 ○○기지○○부대를 찾았다. 그때 그 철조망을 다시 대해보니 무슨 힘으로 이것을 뚫었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지금 같으면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고 했다.
전선의 경비는 그때보다도 철통같이 굳어져있었다는 것.
김씨는 괴인을 행복으로 이끈 대한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새삼 굳게 다짐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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