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휘말린 피맛골 자리, 르메이에르에 무슨 일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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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까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던 각종 선술집과 식당들이 좁은 골목 양쪽에 즐비했던 피맛골(위). 피맛골을 철거한 터에 지하 7층, 지상 20층 규모로 들어선 주상복합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아래). [김성룡 기자]

조선시대, 고관들의 행차가 잦은 경복궁 근처의 큰길을 피해 서민들이 다니던 길이 생겼다. 고관들의 ‘말을 피하다’는 의미의 피마(避馬)에서 ‘피맛골’이라 불렸다. 서울 종로1가에서 3가까지 이어진 그곳에는 선술집과 국밥집 등이 생겼다. 이후 10여 년 전까지 서민들이 빈대떡 같은 음식에 막걸리 한잔으로 애환을 달래던 곳으로 자리 잡았지만 개발바람을 비켜 가진 못했다.

 피맛골 일대는 1981년 도심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다가 장사 터전을 잃지 않으려는 지역상인들의 반대, 문화재 발굴 등의 이유로 재개발이 늦춰졌다. 하지만 2004년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이 착공되면서 일대가 재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건물 역시 2001년 8월 사업 시행인가와 함께 건축허가까지 받았으나 피맛골 보전을 요구하는 문화·예술인과 상인들의 반대로 뒤늦게 공사를 시작했다. 종로1가 일대 9917.4㎡(3000여 평) 부지에 지하 7층·지상 20층 건물이 올라갔다. 이 건물 870여 호실 가운데 730여 호실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분양됐다. 나머지 100여 호실은 시공사인 르메이에르건설이 관리 신탁회사로부터 소유권을 이전받아 다시 분양에 나섰다. 하지만 이 물건을 분양받은 100여 명에게 소유권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으면서 옛 피맛골이 소송전에 휘말렸다.

 청진동에서 골뱅이집을 운영하며 모은 돈으로 상가를 분양받은 박모(60·여)씨는 분양대금을 치렀지만 아직까지 소유권을 넘겨받지 못했다. 박씨가 분양받은 상가는 르메이에르가 또 다른 신탁회사로부터 대출을 받고 담보신탁을 맡긴 물건이기 때문이다. 박씨는 “내 상가가 담보로 잡혀 있는지를 몰랐다”고 말했다. 재미교포 홍모(65)씨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 상가·오피스텔 17채를 사들였다. 하지만 역시 담보신탁된 물건들이었다. 일부는 신탁회사에서 공매처분하면서 영원히 소유권을 넘겨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르메이에르 건설이 사기분양을 했다는 의혹이 짙어지자 박씨 등 피해자 27명이 지난 9월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부장 양호산)는 주식회사 르메이에르와 르메이에르건설의 대표인 정모(62) 회장을 출국금지했다고 29일 밝혔다. 정 회장은 이 건물 100여 호실의 분양대금과 이를 담보로 대출받은 돈 등 450여억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또 회사 직원 400여 명의 임금 72억여원을 3년간 체불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정 회장은 “고의성은 전혀 없었으며 피해자가 발생한 부분에 대해서는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직원들에게 미안하다”며 “평창 올림픽 선수촌 숙소와 이라크 바지안 유전 개발 등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동안 출석을 미룬 정 회장에게 30일에 나와 조사받으라고 네 번째 소환을 통보했다.

글=정종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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