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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지구 철수 후 남은 숙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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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스라엘 의회가 가자 철수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하자는 안건을 부결했다. 이는 분명 철수안을 추진해 온 아리엘 샤론 총리의 승리다. 철수안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분명치 않다. 현재 샤론 총리는 로드맵에 정해진 목표점을 향해 전진 중이다. 목표 지점은 바로 '두 국가 안(案)'이다. 요컨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이다.

일부 비평가는 샤론이 서안(西岸) 지역 대부분에 대한 점령권을 미국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가자를 포기하려는 것뿐이라고 혹평한다. 샤론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신뢰할 수 없는 인물들이며, 로드맵을 지지해 온 러시아.유럽연합.유엔은 철저히 무시될 것이라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조짐은 없다.

가자 지구를 둘러싼 정치 기상도는 크게 변했다. 가장 큰 이유는 투쟁의 대가가 투쟁 당사자들이 참아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데 있다. 텔아비브의 사회경제 연구 그룹인 '아브다'는 최근 발표한 조사보고서를 통해 "37년간의 팔레스타인 점령은 이스라엘 경제를 안에서부터 갉아먹었고, 그 결과 빈곤율이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정치적 타격도 적지 않았다. 정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결과 10년 사이에 내각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1995년에 발생한 이츠하크 라빈 전 총리의 암살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아브다는 "팔레스타인 점령이 이스라엘 내 정치적 갈등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점령과 자살폭탄 테러 때문에 이스라엘은 심한 불쾌감을 느껴왔다. 이스라엘을 떠나려는 이민 행렬도 줄을 이었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인 다비드 벤구리온은 일찍이 "67년의 전쟁으로 점령한 영토를 국제법에 반해 영속적으로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영토는 분명 자산이다. 67년부터 첫 인티파다(봉기)가 일어난 87년까지 20년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두번째 큰 수출 시장이었다. 이스라엘 경제는 팔레스타인 노동력의 유입과 이들이 납부하는 세금 덕택에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티파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점령지는 비용만 잡아먹는 골칫덩어리로 변해갔다. 아브다 보고서는 "2차 인티파다로 이스라엘의 경제성장률과 생활 수준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회적 용역에도 파괴적인 폐해를 끼쳤다"고 평가했다. 실제 2000~2003년 이스라엘의 경제성장률은 8%에서 1%로 급락했고, 하이테크 산업은 사라졌으며, 외국인 투자와 관광객은 끊겼다. 샤론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점령을 포기키로 결정한 것도 이처럼 비극적인 경제 파탄과 사회적인 피폐 때문이다.

이스라엘 의회의 이번 결정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선거를 치를 기반이 마련됐다. 파다.하마스.이슬람 지하드 등 그동안 자살폭탄 테러를 이끌어온 단체들이 '휴전'을 받아들일 공간도 생겼다.

점령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치러야 할 마지막 대가는 외적인 것이다. 예컨대 최근 들어 텔아비브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정착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이 나토 회원국이 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정착 문제를 얘기하기는 쉽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제네바에서 만나 이런저런 합의도 했다. 그러나 이런 합의는 이스라엘 측의 완강한 정착민과 아랍의 비타협적인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언제나 좌절됐다.

샤론의 가자 철수안이 인티파다 이후 가장 중요한 진전으로 여겨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샤론 자신도 이런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러나 숙제는 남아 있다. 87년의 인티파다가 어떤 폭력을 낳았는지는 샤론 자신도 정확히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 가자 철수안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는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윌리엄 파프 IHT 칼럼니스트
정리=진세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