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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의 나를 다시 만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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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박지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지난 주말 친정집에 다녀왔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엄마 묘소에 가서 인사도 드리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마당에서 꽃을 보며 나른한 시간을 보내다 갑자기 창고로 달려갔다. 지난겨울 두고 간 스노보드 부츠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다. 창고엔 우리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물건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오로지 부츠를 찾을 목적으로 이리저리 뒤지다가 검은색 종이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먼지가 뽀얗게 오른 그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어보았다. 이런! 그 속엔 젊은 날의 내가 한 가득 들어 있었다.

 빨간색 장미꽃이 예쁘게 수놓아진 일기장과 대학시절 군대에 간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중학교 때 성적표, 그리고 엄마가 떠준 노란 스웨터 등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서른 살 초반까지의 추억들이 왜 이 상자에 함께 들어 있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또 그걸 내가 넣어둔 것인지 아니면 가족 중 누군가 정리해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상자는 그렇게 오랫동안 먼지만 쌓여가다 드디어 그 주인공의 손에 의해 봉인이 풀렸다.

 나는 아예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내용물을 하나 둘씩 꺼내 보았다. 제일 눈길이 간 것은 낡은 일기장이었다. 1990년 1월 1일부터 그해 겨울까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기록들이었다. 그런데 마치 낯선 어느 여학생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처럼 생소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던가? 우리 가족이 이런 일을 겪었던가? 내가 생각해온 그때의 나와 너무나도 다른 ‘실제의 나’가 거기에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와의 에피소드가 많았다. ‘오늘 저녁엔 엄마가 너무 아파하셔서 뭐 할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 허리를 마사지해 드렸다. 눈물이 막 흐른다. 엄마 아프신 것 때문에 너무 가슴이 아프다(2월 7일)’. ‘점심 때 엄마한테 혼나고 나는 엉엉 울었다. 마침 엄마가 만두를 찌고 있어서 금방 울음을 그쳤다. 만두 먹고 울자고. 그런데 후엔 안 울었다. 엄마 만두가 너무 맛있어서 다 잊어버렸다(8월 7일)’. 나는 엄마가 아프실 땐 눈물을 흘리는 착한 딸이었고, 만두에 목숨을 거는 철부지 딸이었다.

 두 살 차이 나는 언니와의 신경전, 늦둥이 남동생에게 받는 소소한 스트레스 등 일기에는 가족들과의 깨알 같은 사건들도 많았다. ‘언니가 엠티 갔다 와서 코를 골며 쿨쿨 잔다. 얄미워. 이번에 나온 이문세 6집 테이프 또 안 사 왔다’, ‘오늘이 내 유일한 늑대 같은 동생의 생일이다. 난 거금을 내어 케이크를 사주었다. 물론 언니는 1천원만 보탰다. 그때 난 언니의 양심 찔리는 소리를 들었다’ 등등. 저녁 때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일기를 돌려보며 웃음꽃이 피었다. 누구보다 야무지고 착한 언니는 내 일기장에서 놀기 좋아하고 공부 싫어하는 ‘문제아’였다. 듬직한 내 남동생은 당시 누나의 심기를 매일 건드리는 ‘악의 무리’로 묘사돼 있었다. 이 일기장 하나 덕분에 온 가족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다. 하루하루 전쟁같이 사느라 모두 잊고 있었던 지난날들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일기장과 함께 나의 마음을 찡하게 만든 건 엄마가 남긴 노란 스웨터였다. 엄마는 몇 년간 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옷이며 모자, 목도리를 즐겨 뜨셨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이 노란 스웨터가 기억에 없다. 언니 말로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추위를 잘 타는 나를 위해 떠놓았다는 것이다. 10여 년간 먼지 묻은 상자 안에서 주인의 눈에 뜨일 날만 기다린 걸 생각하니 미안했다. 나는 엄마가 남긴 이 소중한 스웨터를 내 연구실 의자에 걸어두었다. 아직 스웨터를 입기는 이른 시기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이 스웨터를 입을 것이다. 그러면 엄마가 나를 꼭 안아주며 “다 괜찮아”라고 위로해줄 것만 같다.

 전혀 생각지 못한 먼지 묻은 상자의 출현으로 이번 친정 나들이는 다른 때보다 더 따뜻하고 행복했다. 내일부터 추석 연휴다. 고향에 가는 분들이 있다면 꼭 시간을 내서 나의 어린 시절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길 바란다. 나처럼 운 좋게 열여덟 살 시절 일기장을 찾아본다면, 그래서 가족들끼리 그 시절을 돌아보며 웃을 수 있다면, 이번 추석이 그 전보다 몇 배는 행복하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박지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