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화가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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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 동안 너무나 책을 멀리한 탓인지 오늘밤엔 오랜만에 책을 읽으려 하니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고 갖가지 생각들이 책에 와서 머문다.
『국민학교 건데 몰라? 이모는 학교 안 다녔어?』얼마 전 언니 집을 찾아갔을 때 공부하던 5학년 짜리 조카의 질문에 모른다고 무성의한 대답을 하자. 무척이나 실망 어린 얼굴이 되어 나에게 대들던 말이다. 조카의 그 물음은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문득 검정 제복의 그 시절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여러분 책을 부지런히 읽으시오.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라도 먼 훗날 여러분의 2세가 엄마 이게 뭐야? 하고 질문했을 때 모른다고 대답하는 무능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선생님의 그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들은 시시한 말씀만 하신다고 버릇없이 마구 웃어대었었다.
그때는 그렇게 웃음으로 흘려 버렸던 그 평범한 말이 지금은 어떤 진리처럼 가슴 깊이 젖어 드는 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비어 가는 머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가 보다. 책벌레라고 놀림까지 받던 내가 이렇게 머리가 텅 비도록 책과 담을 쌓을 줄은 나도 몰랐다.
어느 신문에선가 우리 국민 1인당 1년 독서 량은 겨우 48페이지인데 유럽은 1천8백페이지, 일본은 3천페이지에 달한다는 기사를 읽고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이것이 정확하게 파악한 숫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엄청난 차이는 우리의 문화수준의 낮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만 같아서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예부터 가을을 등화가친의 계절이라 일러 왔는데…. 이 가을이 가버리기 전에 독서 삼매경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김숙자<서울시 종로구 신문로1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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