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통신] 아랍국들 초라한 반전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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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원래 아랍 나라들의 반미.반전시위란 게 간단해요. 관(官)에서 나온 듯한 사람이 구호를 선창하면 기계적으로 몇번 따라 외치다 성조기를 찢고 해산하는 거죠. 이번엔 다를까 해서 지켜봤는데 역시나였어요. "(요르단 암만에서 반전시위를 지켜본 서방 외교관)

사상 최대의 반전시위가 전세계적으로 벌어진 지난 15일. 이라크와 한 핏줄을 자처하는 아랍 국가들의 시위는 상대적으로 매우 초라했다. 시리아.요르단.이집트 등의 시위 참가자는 수백에서 수천명이 고작이었다.

적게는 60만명, 많게는 2백만명이 거리를 메운 미국.영국.프랑스.스페인 등 서구 국가들과는 비교가 안됐다. 이집트에선 시위대(1천여명)가 경찰(2천여명)에 압도돼 시위가 사실상 무산됐다.

지구촌의 이목을 끌고 있는 '인간방패' 자원자도 아랍권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요르단 등 아랍 각국의 반전단체들은 이달 초 "최소한 2천명은 방패를 자원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15일 현재 아랍 출신 자원자는 2백명도 안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나마 이라크로 출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바그다드에서 만난 인간방패들은 대부분 유럽 각국과 미국 출신이었다.

아랍에미리트 일간지 걸프뉴스는 시위 다음날인 16일 '서구는 밀리언스(수백만), 아랍은 헌드레즈(수백)'란 제목의 칼럼에서 "아랍인이란 게 부끄럽다"고 개탄했다. 칼럼은 "아랍 민족이 자신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라크 위기)에 침묵하고 서방의 손에 해결을 맡긴다면 영영 식민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암만의 한 외교관은 "아랍이라는 공통의 이념은 개별 국가의 이해 앞에 지리멸렬한 상태"라고 단언했다. "이라크전과 관련한 아랍 각국의 관심사는 자국의 안전보장과 경제안정이고 아랍이란 명분은 한참 뒤"란 것이다.

이를테면 전쟁 발발시 요르단의 최대 관심사는 이라크가 이스라엘을 겨냥해 발사한 스커드 미사일이 자국 영토에 떨어질 가능성을 막는 것이다. 또 팔레스타인은 전쟁으로 미국이 정신없는 틈을 타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영구 추방하려들까봐 전전긍긍한다.

이들 나라의 눈은 오로지 미국의 일거수 일투족에 쏠려 있다. 미국이 나라의 안전을 책임져주고, 경제적 지원을 보장해주면 이라크 공격을 모른 척하거나, 드러나지 않게 도와줄 수도 있다는 게 이들의 속마음으로 보인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같이 "전쟁광 미국을 반대한다. 형제 이라크를 돕자"고 외친다.

그러나 중동 주재 서방 외교관들은 "그건 여론을 의식한 립서비스일 뿐 행동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입을 모았다.

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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