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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있는 진짜 관료를 찾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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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종윤
뉴미디어 에디터

이번 세제 개편 파동을 겪으면서 궁금한 게 생겼다. 세제개편안은 발표 닷새 만에 원안이 폐기되고 수정안이 나왔다. 기획재정부 세제실과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근무하면 한국에서 가장 유능한 공무원으로 꼽힌다. 이런 엘리트들이 6개월간 야심차게 다듬은 세제개편안을 휴지 버리듯 버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원안 발표 나흘 만에 “서민·중산층의 지갑을 얇게 하는 건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과 어긋난다.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했다. 개편안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수정안은 대통령의 발언 다음날에 나왔다.

 궁금증은 여기서 나온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즉각 개편안을 들고 온 경제 관료들의 신궁(神弓) 같은 솜씨다. 수정안도 논란은 많지만 어쨌든 하루 만에 탄생했다. 탁월한 능력이다. 이런 능력은 어디서 나오나.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면 괴력이 생기나. 그렇진 않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엘리트 관료들은 미리 여러 안을 만들어 두었을 게다. 첫 개편안이 벽에 부닥치자 바로 두 번째 안을 제시한 것이다. 관료들이 이미 원안의 문제점을 꿰뚫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증세(增稅) 없는 복지’라는 대통령의 공약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구호는 신성불가침한 것이다. 눈치 빠른 관료들은 이런 권력의 생리에 탁월하게 적응한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된다는 사탕발림이 시작됐다. 그들은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꿔 월급쟁이들의 세금 부담을 늘렸다.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그런데도 세율이나 과표 구간을 조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증세가 아니라고 했다. 경제관료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로 꼽히는 조 수석이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현오석 부총리는 나라 곳간 사정상 증세 없이 5년간 135조원을 투자하는 공약은 이룰 수 없는 목표라는 걸 잘 알 텐데도 입을 닫았다.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공무원이 영혼을 버려야 출세가도를 달리는 게 한국 관료사회의 법칙인가 보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처럼 분칠을 할 줄 알아야 능력 있는 인재가 된다. 이런 관료들은 승승장구한다. 국장은 실장으로, 실장은 차관으로, 차관은 장관으로 올라간다. 중간에 탈락해도 문제없다. 로펌으로 옮겨 서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연봉을 받고 로비스트가 되면 그만이다. 대신 화장을 켜켜이 한 정책들은 곧 부작용의 속살이 드러난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된다.

 박근혜정부가 출범 6개월 만에 시험대에 올랐다. 복지공약 달성은 증세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세금을 더 안 거두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면 공약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 항모의 진행 방향이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고민할 것 없다. 뱃머리를 돌려야 한다. 태풍의 진로를 파악해 선장에게 키를 돌리라고 조언하는 건 참모들의 몫이다. 지금은 권력의 핵심부에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진짜 관료’가 필요한 때다.

김종윤 뉴미디어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