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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와 며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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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사고는 보험사에 악재다. 보험금을 왕창 물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엊그제 신한금융투자가 의외의 보고서를 냈다.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가 재보험사인 코리안리에 호재라는 분석이었다. 재보험사는 보험사가 다시 보험을 드는 곳, 그러니까 보험사의 보험사다. 사고가 호재가 된 첫째 이유는 코리안리의 손실이 200만 달러(약 22억원)로 제한적이란 점이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회사에 큰 문제는 아닌 수준이다. 코리안리가 여러 방식으로 위험을 관리한 덕이다. 이번 사고로 항공보험료율이 올라 앞으로 보험사 이익이 커질 것이란 전망이 더해졌다.

 역설적 분석의 대상이 된 코리안리는 유별난 회사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처우가 좋아 ‘신이 숨긴 직장’이란 우스개도 나온다. 원래는 공사였다. 1963년 설립된 대한손해재보험공사가 전신이다. 78년 민영화돼 대한재보험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러나 변한 건 없었다. 시장을 독점한 회사는 나태했고, 정부는 공무원을 사장으로 내려 보냈다. 80년대 초반 최대주주가 됐던 원혁희(87) 코리안리 회장은 “주인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경영진은 자리 보존에만 여념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회사 주식을 다 팔아버렸다.

 변화가 시작된 건 외환위기 때다. 재보험 시장은 개방됐고, 회사는 자금난에 빠진 상태였다. 재무 관료 출신인 박종원(69) 전 사장이 사장을 맡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물론 ‘낙하산’이었다. 이즈음 원 회장도 회사 주식을 다시 사들였다. ‘제대로 살려보자’는 야망을 가지고서였다.

이때부터 원 회장과 박 전 사장의 15년 동고동락이 시작됐다. 박 전 사장은 노조의 협조를 얻어 과감한 구조조정을 했고, 도전·변화·혁신의 기업 문화를 쌓아갔다. 쓰러져 가던 회사는 이제 아시아 1위의 재보험사가 됐다. 가장 궁금한 건 오너와 ‘낙하산’의 관계였다.

 -오너 있는 회사의 사장 힘들지 않았나.

 “아니다. 믿고 맡겨주셨다. 믿어주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

 -오너와 경영인은 어떤 관계여야 하나.

 “시아버지와 며느리여야 한다.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는 늘 어렵다. 그러나 똑똑한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슬기롭게 자기 의견을 전달하고 관철한다. 좋은 시아버지는 그런 의견을 받아주고 격려한다.”

 박 전 사장이 퇴임하면서 코리안리는 6월 오너 경영에 들어갔다. 원 회장의 3남인 원종규(54) 사장이 대표를 맡았다. 그는 28년 전 이 회사에 들어와 ‘시아버지와 며느리’를 보며 보험 일을 익혔다.

 공기업 사장 인사가 곧 있다고 한다. 이왕 할 인사라면 좋은 시아버지가 똑똑한 며느리를 찾는 과정이길 바란다. 적어도 독한 시어머니에 눈치 보는 며느리는 피했으면 한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코리안리의 미래를 지켜볼 생각이다. 공기업 사장 인사 이후의 감상평도 그랬으면 좋겠다.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