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잘 사는 안락한 미래는 없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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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호 28면

박물관에 가면 마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구석기시대 방과 신석기시대 방을 거쳐 청동기시대 방으로 들어서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벌써 몇 세기가 지나갔구나.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39> 『타임머신』과 H. G. 웰스

기나긴 역사는 이렇게 전시실 한편에 조용히 쌓여가고 남는 것은 흔적뿐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면 먼 후손들이 또 우리의 유물들을 모을 텐데, 그들은 과연 그 증거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왜 이 사람들은 그토록 미친 듯이 돈을 벌려고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쓴웃음을 짓지나 않을지. 그러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돈의 시대’ 혹은 ‘탐욕의 시대’라고 이름 붙일지도 모른다.

H.G.웰스(Herbert George Wells,1866~1946) 어려서부터 포목점 점원과 약품상 보조 같은 직업을 전전하다 과학사범학교에서 생물학을 공부해 과학교사가 됐다. 폐결핵으로 요양 생활을 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해 현대문명에 대한 암울한 비전을 그려낸『모로 박사의 섬』과『투명인간』『우주전쟁』등 100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너무 부정적인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미래 세대가 그렇게 과거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보다는 물욕에 훨씬 덜 물들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낙관주의자다. 한데 타임머신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H. G. 웰스는 그렇지 않았다.

웰스가 1895년 발표한 소설 『타임머신(The Time Machine)』은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기계, 즉 타임머신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든 시간 여행자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섬뜩하면서도 좀 황당한 이야기인데, 그는 이 작품에서 인류가 맞이하게 될 어둡고 참담한 미래 세상을 그려낸다.

시간 여행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도착한 서기 80만2701년의 지구는 언뜻 보기에는 온화한 기후에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에덴동산 같은 곳이다. 거기서 처음 만난 엘로이라는 종족 역시 매우 아름답고 우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래 사회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황폐하고 퇴락한 곳이다. 엘로이 역시 지적인 능력과 활력을 상실한 채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다.

“쇠퇴해 가는 인류와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나는 우리가 현재 힘쓰는 사회적 노력이 뜻밖의 결과를 낳았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아주 당연한 결과다. 힘은 필요의 소산이고 안전은 연약함을 가져오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인류는 두 개의 종으로 따로 진화했다. 지상에서는 가진 자들이 쾌락과 안락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안, 지하에서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 소름 끼치는 흉악한 존재로 변해갔던 것이다. 풍요로운 삶 속에서 노동이 필요 없어진 지배 계급과 힘겹게 생산을 담당했던 노동자 계급이 각각 무력한 엘로이 종족과 지하 괴물 같은 몰록 종족으로 진화한 것인데, 채식주의자인 엘로이와 달리 몰록은 육식을 하고, 그들이 잡아먹는 것은 다름 아닌 엘로이들이다.

“이제 나는 지상 사람들이 지닌 아름다움의 이면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완전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환한 낮에는 소떼처럼 즐겁게 보내는 듯했다. 그들은 소떼처럼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소들과 마찬가지로 최후를 맞이했다.”

시간 여행자는 인간의 지적 능력이 만들어낸 꿈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깨닫는다. 발전과 진보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안락하고 편안한 사회를 만들어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이런 세상인 것이다. 완벽한 과학 지식으로 무장한 지배 계급은 자연을 굴복시켰지만 동시에 같은 인간, 심지어 자신들까지도 굴복시켰던 것이다.

“다재다능한 지적 능력은 변화와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얻게 되는 보상인 것이 자연의 법칙인데,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곤 한다. 자연은 습관이나 본능이 더는 유용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지능에 호소하는 법이다. 변화나 변화의 필요성이 없는 곳에서는 지적 능력이 존재할 수 없다. 온갖 위험과 끔찍한 결핍에 직면하는 동물만이 지적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

시간 여행자는 지구의 운명에 관한 비밀에 이끌려 3000만 년 후의 세계로 가본다. 그곳에는 거대한 태양이 어두운 하늘을 거의 10분의 1이나 가리고 있었고, 해변에는 거무스름한 녹색 이끼를 빼고는 아무런 생명체도 보이지 않았으며, 간혹 흰 눈이 쏟아져 내릴 뿐 온 세상은 침묵뿐이었다.

시간 여행자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현재로 귀환했던 그는 다시 한번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지만 3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미래 세계에서 가져온 하얀 꽃 두 송이만 남긴 채. 이 꽃은 그가 생명을 구해주었던 여성 엘로이가 그의 주머니에 넣어준 것이었다. 웰스는 마지막으로 한 가닥 희망을 본다.

“문명의 발전이란 부질없이 쌓아놓은 것에 불과하며, 결국에는 문명을 세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꽃은 시들어가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지성과 힘은 사라지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리라.”

혼자만 잘 사는 그런 안락한 미래는 없다. 타임머신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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