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꽃 낳으려고 온실서 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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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경남 창원시 대산면 경남화훼시험장에는 하루종일 꽃밭에서 사는 ‘꽃 삼총사’가 있다.김진기(金晉淇·46)·정용모(鄭容謨·43)·빈철구(賓哲九·46) 연구사가 주인공.

이들의 임무는 신품종 개발이다.세 사람은 화훼농가가 많이 재배하는 장미(金)·거베라(鄭)·호접란(賓)을 각각 맡아 1997년부터 연구해오고 있다.

이들이 신품종 개발에 나설 당시 한국은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 가입을 앞두고 있었다.UPOV에 가입하면 해외 종묘사가 개발한 품종을 재배·판매할 경우 비싼 로얄티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국내 화훼 농가는 치명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 2001년 UPOV 가입으로 장미는 그루당 1달러씩 로얄티를 물고 있고,거베라(2004년)·호접란(2006년) 등도 곧 로얄티를 물어야 할 형편이다.

鄭연구사는 “UPOV 가입을 앞두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게 아니라 우리도 신품종 개발로 맞불을 놓아 보자고 의기투합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하지만 신품종 개발 작업은 한마디로 고행 길이었다.

시장성이 있는 우량 품종을 찾아내려면 우선 로얄티를 물지 않아도 되는 실험용 모본(母本)을 인공수정시켜 씨를 받아낸 뒤 이를 파종해 수십차례의 선발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모본은 한번만 수정하는 조건으로 수입하기 때문에 연구팀들은 수정기간에는 거의 24시간 온실 안에 머무르며 수정상태를 점검해야 했다.평상시에도 야간의 개화습성 등을 관찰하느라 퇴근은 으레 오후 10시가 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세계적인 화훼종묘사들이 평균 5∼6년으로 잡는 신품종 개발 기간을 3년으로 단축했다.

이렇게 해서 새품종을 찾아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색깔·수량·병충해·개화습성 등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이 정한 50여 기준에 따른 까다로운 검사를 통과해야 비로소 신품종으로 등록되기 때문이다.

신품종을 찾아낼 확률은 10만분의 1.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

연구팀이 보유한 품목당 온실 면적은 1백20평(호접란)∼3백평(장미·거베라).연간 1억여원에 불과한 연구비와 서너명뿐인 연구원을 갖고 이런 업무를 해오고 있다.

외국 종묘회사들이 한 품종 개발에 1만여평의 온실을 갖고 수십억원의 개발비를 들이는 것과 비교하면 열악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외국종묘사들이 놀랄 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鄭연구사는 2001년 거베라 신품종인 화이트데이·새봄 등 6종을,지난해엔 스마트·루나 등 4종을 등록해 모두 10개의 신품종 등록 실적을 올렸다.金연구사도 지난해 장미 신품종인 레드 템·니나 등 4종을 등록했다.

賓연구사는 국내서 처음으로 향기나는 호접란 등 20여종의 호접란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국내 야생란과 기존 호접란을 교배시켜 개발한 이 호접란은 은은한 향 때문에 외국종묘사들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들 개발 품종 가운데 장미·거베라는 경남도 내 농가에 보급 중이며,호접란은 등록을 마치는대로 내년쯤 농가에 보급할 예정이다.

세 연구원은 화훼 선진국들을 자주 찾아 기술 습득에 힘쓰고 있다.

鄭연구사는 2001년 4월부터 1년 간 네덜란드 와게닝겐대학 국제식물연구소에서 거베라 육종법을 연구했으며,金연구사는 그동안 네덜란드를 세번이나 다녀 왔다.賓얀구사도 미국 워싱턴주립대 생화학연구소에서 식물유전공학을 연구했다.

화훼 농가는 이들이 개발한 신품종을 크게 반기고 있다.

1천5백평의 온실에 장미·거베라 등을 재배하는 김해시 대동 화훼마을 김겸조 운영위원장(55)은 “온실에 수입 품종을 심을 경우 로얄티로 4천여만원쯤은 나갔을 것”이라며 “로얄티 부담이 없는 국산 신품종에 대한 소비자 반응이 괜찮은 만큼 앞으로 많이 심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꽃 삼총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경남도는 올들어 일본·중국 꽃 시장을 겨냥한 수출전진기지를 구축한다는 계획 아래 ‘화훼산업 5개년 계획’을 확정했다.또 3억여원을 들여 오는 3월부터 네덜란드 화훼전문가 4명을 1년간 초빙해 기술지도를 받기로 했다.

김진기 연구팀장은 “기술이 풍부한 외국 화훼회사들에 맞서는 것이 힘들지만 몇년안에 우리의 신품종도 외국에 로얄티를 받고 팔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창원=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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