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명예의 전당 (26) - 레지 잭슨 (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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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승리의 감격이 가져온 평온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잭슨과 마틴 사이의 반목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팬들은, 차츰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잭슨은 자기 집이 있는 오클랜드에서 몇 가지 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일 때문에 1978시즌 스프링 캠프에 다소 늦게 합류한다는 사실을, 스타인브레너에게만 통보하고 감독인 마틴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이를 알게 된 마틴의 심기가 편할 리는 만무했다. 더구나 잭슨은 "구단주는 내가 비즈니스 때문에 바쁘다는 것을 이해해 주지. 그는 비즈니스맨이니까." 라는 말을 했다. 이 발언은 '마틴은 비즈니스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시즌이 시작되자 잭슨은 전년도처럼 초반에 부진을 보였고, 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드삭스는 양키스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지구 선두를 질주했다. 그러자 스타인브레너는 불만을 드러냈다. 구단주가 클럽하우스에 출입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지만, 스타인브레너는 그 곳까지 찾아가서 선수들을 질타하곤 했다. 그러한 행동이 팀 분위기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 없었다.

팀의 분위기가 잔뜩 가라앉아 있던 때던 7월 17일, 사건이 터졌다. 캔자스시티에서 벌어진 양키스와 로열스 간의 경기가 5 대 5 동점인 상태로 연장 10회초에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서먼 먼슨이 1루에 있는 상황에서, 잭슨이 타석에 들어서자 마틴은 3루 코치 딕 하우저를 통해 잭슨에게 번트 사인을 전달했다. 이는 잭슨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번트에 대하여, 마틴은 잭슨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틴은 양키스에서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 미키 맨틀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자신의 친구가 자주 번트를 대는 것을 직접 보아 왔다. 마틴이 '어떤 강타자에게든 필요할 경구 번트를 지시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잭슨은 초구에 번트를 대려다 멈췄다. 그 때 마틴이 번트 지시를 취소하고 스윙을 하라는 사인을 냈으나, 잭슨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번트를 시도했다. 결국 잭슨은 투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번트 시도가 파울로 끝나 삼진을 당했다.

마틴은 당장은 잭슨을 교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가 로열스의 승리로 끝난 뒤, 마틴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하였다. 그는 클럽하우스에서 고함을 지르며 라디오와 술병 등을 마구 집어던졌고, 기자들은 이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하고 있었다.

어느 기자가 잭슨에게 물었다. "번트 사인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몰랐습니까?"

잭슨의 대답은 이러했다. "왜 몰랐겠습니까. 알고 있었죠. 하지만 내 임무는 고작 주자를 진루시키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감독은 내가 내 방식대로 스윙을 해서 팀에 기여하기를 바랄 자격도 없는 것 아닙니까? 나를 주전감도 못 되는 놈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죠."

잭슨은 감독의 지시에 불복한 대가로 5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양키스는 잭슨 없이 트윈스를 상대로 원정 3연전을 가진 데에 이어 화이트삭스와 대결하기 위해 시카고로 떠났다. 잭슨은 시카고 원정 마지막 경기 전에야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 경기가 끝난 뒤 뉴욕타임스 기자 머리 채스는 마틴과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주벽으로 유명했던 마틴은 이 때 역시 만취한 상태였다. 그는 거침없이 잭슨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 자식이 그 망할 놈의 입을 다물지 않는다면, 내가 출장을 안 시키면 그만이야. 구단주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내 목을 칠 테면 치라지." 마틴이 이 정도에서 그쳤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온 발언이었다.

"그 두 인간은 서로 너무나도 잘 어울려. 한 놈은 타고난 거짓말쟁이이고, 또 한 놈은 범죄자 신세이니 말야." 말할 것도 없이 전자는 잭슨을, 후자는 스타인브레너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스타인브레너는 1972년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 진영에 불법적으로 자금을 기부한 것이 2년 뒤 문제가 되는 바람에 커미셔너 보위 쿤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바 있었다.

사실, 잭슨과 스타인브레너에 대한 그 표현은 마틴의 '작품'은 아니었다. 그레익 네틀스가 클럽하우스에서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두 사람에 대하여 그렇게 말한 바 있었고, 마틴은 그 표현이 너무나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기자를 만나게 되자 그 말을 술김에 그대로 해 버린 것이었다.

물론 인터뷰 내용은 곧바로 보도되었다. 스타인브레너가 그 기사를 보고도 마틴에게 자비를 베풀 만큼 인내심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틴은 고용주의 해고 통보를 받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마틴의 후임자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왕년의 대투수 밥 레먼이었다. 그는 화이트삭스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뒤 몇 주만에 다시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자신의 부임 직후 잭슨의 부진이 이어지자, 신임 감독 레먼은 어느 날 이 자존심 강한 슬러거를 7번에 기용하였다. 잭슨은 '당연히' 항의하였으나, 레먼은 이렇게 대답했다. "클린업 자리를 맡고 싶다면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모습을 보이면 돼."

이 때부터 잭슨은 달라졌고, 전년도 후반기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그리고 한때 레드삭스에 14경기나 뒤져 있던 양키스는, 잭슨과 투수 론 기드리 등을 앞세워 후반기에 맹추격을 전개했다.

결국 양키스와 레드삭스는 당초 예정되었던 페넌트레이스 경기들을 모두 마친 상태에서 똑같이 100승 62패를 기록하였고, 보스턴에서 지구 챔피언을 가리는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이 플레이오프는 단판 승부였으므로, 양팀은 이 경기에 사활을 걸었다.

(9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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