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황고집-이기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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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평양에 황씨 성을 가진 고집장이가 있어서 별명이 황고집으로 통하였다. 일찌기 어떤 일로 서울에 올라왔는데, 마침 서울친구의 초상을 만났다. 동반자가 같이 조문을 가자고 하였던, 황고집은 말하기를 「이번에 서울 올라온 것은 친구의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니 그리 할 수 없다」하고는, 일단 평양에 갔다가 조상을 위하여 다시 상경하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가 사는 집 근처의 개울에 다리를 놓는데 옛 묘광의 회로 이를 쌓았다. 황고집은 「묘물을 밟고 다닐 수 없다」하여 매양 다리 밑으로 물을 건너 다녔다. 하룻밤은 도둑놈들이 다리 목을 지키고 있는데, 그가 나타나 다리 밑으로, 건너는 것을 보고는 황고집임을 알고 건드리지 않았다. 이로부터 고집 센 사람을 일러 「평양 황고집」이라고 하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황고집의 경우는 우리에게 어떤 감동까지를 가져다주는 죄 없는 고집이다. 남에게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고통을 더하는 결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고집은 이와 반대되기 마련이다. 고집이란 여러 사람에게 모두 관련되는 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굳이 자기 한 사람의 의견을 내세우려고 할 때에 생기기 때문이다. 고집장이들은 남이야 어찌됐든 자기 한 사람의 이익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뻔뻔스런 사람들이 믿음직스럽다고 자천 타천으로 뽑히어 출세를 한다. 역사의 기록에 남는 인물들도 대부분 이런 고집장이들인데, 그 고집장이들과 씨름하는 역사가의 신세도 따분하다 하겠다.
고집장이라고 하면 여기저기 들끓는 독재자들이 생각난다. 모두 다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추방되어야 할 존재들이다. 그러나 황고집과 같은 고집장이는 현대에도 더러 있어서 좋지 않을까. 최소한 그는 우리들에게 티없는 웃음을 나누어주는 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국사학·서강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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