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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방송 50년(17)이덕근
조선「호텔」앞, 지금 왕궁다방이 있는 3층 건물은 본래「텔러·빌딩」이었다. 이 3층에 신문·「라디오」에 「뉴스」를 공급하던 동맹통신 한국지사가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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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방송 50년(16)이덕근
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 할 때까지 우리말을 마지막까지 사용할 수 있던 곳은 오직 제2방송과 뿐이었다. 그래서 제2방송과장인 이혜구씨는 언제나 부하직원들에게『여기는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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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186)방송 50년(15)이덕근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총독부는 한국의 저명한 인사들을 방송국 「마이크」앞에 끌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때 방송국에 끌려나온 사람이 읽는 원고는 물론 자신이 쓴 원고도 아니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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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방송 50년(13)|이덕근
태평양전쟁이 중반에 들어선 1943년 3월에서 4월까지 사이에 경기도 경찰 부의 고등계 형사들이 방송국의 한국인 기술자와「아나운서」의 집을 소리 없이 급습, 약 40명을 연행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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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방송 50년(12)|이덕근
우리 나라 방송이 국제적으로 이용되기는 1937년7월 이른바 장고봉 사건 때이다. 장고봉 사건이란, 소련파 일본이 두만강근처 국경에서 1937년 7월11일 분쟁이 일어나 18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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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방송 50년(11)|이덕근
처음 일본말로 된 방송국을 세웠다가 1933년에 소위 이중 방송이라 하여 우리말 방송을 따로 둔 것은 한국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불편을 덜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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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 환 국
일제시대 일본인이 갖고 간 이조 시대의 측우기 원기가 지난14일 56년만에 되돌아와 16일 하오2시 국립과학관에서 인수 전시되었다. 직경 2㎝에 높이 45㎝ 무게 4.2㎏의 이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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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방송 40년(7)|이덕근(제자는 필자)
경성방송국이 27년2월 방송을 시작할 때의 출력은 말코니 송신기 1㎾였다. 실패와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33년4월에 제2방송이 생길 때는 10㎾로 출력이 늘어나고 33년7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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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제자는 필자|제13화 방송 50년(1)
※편집자주=이덕근씨는 1943년 경성방송국에 입사, PD 또는 아나운서로 활약하다 해방 후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서라벌예술대학 방송학과 교수로서 계속 우리나라 방송문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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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조선은행
한국은행에 입항하기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매우 힘들었다. 더우기 한국인으로서는 조선은행에 입항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었다. 총재가 연전이나 보전 등에서 우수한 졸업생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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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볼 고문서·필사본
해방이후 계속 서고에만 방치돼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의 고문서·필사본들이 이체 본격적 정리작업으로 처음 햇볕을 보게 됐다. 교지를 비롯, 토지문서, 노비문서·외교문서 등 많은 종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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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제12화 조선은행(1)
조선은행이 처음 설립된 것은 내가 입행하기 8년전이니까 1909년(명치42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은행권발행이나 국고업무를 맡고 있던 일본계 제일은행으로부터 이들 업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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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경성제국대학(9)|강성태
수가 적은 데다 민족적인 차별대우에 불만이 많았던 한국학생들은 무슨 일이고 단결했으나 싸움이 일어나면 더욱 단결력을 과시했다. 현석호씨가 옛과에 다닐 때 이른바 「달밤의 소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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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제11화 경성제국대학(2)
경성제대가 일본교육제도에 따른 신교육령에 의해 설립됐기 때문에 구교육령에 따른 학제로 교육을 받은 한국학생들은 입학자격문제를 둘러싸고 큰 진통을 겪었다. 고등보통학교까지 8년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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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경성제국대학-개교
※편집자주=필자 강성태씨는 1903년 서울에서 태어나 21년 경성고등보통학교 (현 경기중 고교)를 졸업한 뒤 경성제대개교와 함께 입학, 29년 법문학부를 1회로 졸업했다. 강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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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우정 80년 (8)|강직순
구 한국 시대 우리 나라 우표는 1905년4월1일 소위 한일 통신 합동 협약이 맺어짐에 따라 없어지게 되었다. 1884년 선각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나오게 된 우리 나라 우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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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립 도서관서 신문 정리 40년
국립 중앙 도서관 일람과에 촉탁으로 재직하는 이의영씨 (65·서울 마포구 망원동 75) 는 25세 때부터 40년 동안 다른 출판물과 함께 신문 보관 업무를 맡아온 「베테랑」.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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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황성 기독청년회(15) 오리 전택부(제자는 필자)
초대 기청 회장이던 게일 박사는 어느 날 총독부에 들렀다가 나와서 정무총감 말이『이상재씨는 외모는 산 도둑 놈 같고 명예에 관한 일이라면 절대로 안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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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기독청년회(13)|오리 전택부(제자는 필자)
3·1운동이 있은 다음해 1920년 여름의 일이다. 미국회상하의원단일행 50명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국내 지도자들은 환영준비위원회 본부를 YMCA안에 두고 동아일보의 장덕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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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황성 기독 청년회(9)|오리 전택부(제자는 필자)
육당 최남선 선생이 생존해 계실 때 필자가 문병을 가서 『선생님, 3·1운동 때의 독립선언문은 선생님이 쓰신 것인 줄을 세상이 다 아는데, 그 속에는 기독교 사상이 많이 들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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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제7화 양식반세기(7)
1933년2월에야 정식으로 「웨이터」가 된 나는 안동·신의주뿐만 아니라 청진·나진·부산 등을 오르내리며 양식을 「서브」해왔다. 견습 딱지는 떨어졌어도 일본 사람은 2원씩 받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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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양식 반세기(제7화)
널리 알려진 대정객이나 외국에 다녀온 명사들이 주로 양식 「테이블」을 차지했던 때이지만 언론인 김을한씨는 1920년대부터 「레스토랑」에 나와 늘 낮을 익힌 얼굴이다. 김씨는 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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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양식 반세기 (1)|이중일
【편집자주=필자 이중일씨 (59·현 미장 「그릴」주인)는 반세기를 하루같이 「포크」와 「나이프」가 그의 손에서 떠난 일이 없어 한국의 『살아 있는 양식사』라 불릴만하다. 그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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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창군전후(3)|이경석(제자는 필자)
나는 스마트라 섬에서 해방을 맞았다. 제25군이 주둔한 이 섬에서 철도부대에 소속해 있었다. 우리가 패전을 알리는 일본천황의 방송을 들은 것은 8월16일이었다. 제25군에서는 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