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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12) 제80화 한일회담(211)

    혁명정부의 두 핵이었던 박정희최고회의의장과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은 한일문제에 관해서 일찍부터 의기가 투합해 있었다. 김부장이 미국무성초청으로 출국할 때는 박의장과 김부장간에 이미 한일

    중앙일보

    1984.05.12 00:00

  • 제80화 한일회담(210)-김부장-일재계대표 환담

    62년 9월 하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그의 청구동 자택에서 10여명의 일본 경제인들과 환담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5차5개년 계획의 참여 가능성을

    중앙일보

    1984.05.11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010) 제80화 한일회담(209) 윤곽 드러난 일「카드」

    한일회담은 62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수개월간의 소강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께다」 일본수상은 7월의 총재선거에서 재선관문을 무난히 돌파, 안정기에 접어들게돼 한일회

    중앙일보

    1984.05.10 00:00

  • (4009)첫 정치회담 결렬-제80화 한일회담(208)

    한일회담 타결을 위한 양국 외무장관간의 정치회담 개최가 당시로서는 눈이 번쩍 띄는 진전이었다. 우선 「정치적 타결」이라는 용어자체에 거부반응을 보여온 일본의 일부 여론에도 불구하고

    중앙일보

    1984.05.09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80화 한일회담 (207)|찻잔속의 해전|김동조

    『한국이 미불임금과 연금등 분명한 법적 근거를 가진 청구권만 요구키로 박·「이께다」회담에서 동의했다』는「이제끼」국장의 발언은 일본측이 박의장의 말을 자기네 유리한대로만 해석한 결과

    중앙일보

    1984.05.07 00:00

  • (4007)제80화한일회담(206) 중요한 변화 징조

    박정희최고회의의장은 일본에서 꼭 30시간을 머물렀다. 박의장이 「케네디」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총총히 떠난 다음날 「이께다」 수상은 그의 각료들에게 『이번 회담은 99%

    중앙일보

    1984.05.03 00:00

  • (4006)제80화 한일회담(2005) 박-「이께다」단독요담 | 김동조

    양국수뇌의 단독대좌를 통역한 사람은 엄영달아주과장이었다. 당초에는「마에다」 일본외무성북동아과장이 일본측 통역으로 배석하기로 돼있었으나 양쪽의 합의로 엄과장이 통역을 전담하기로 조

    중앙일보

    1984.05.02 00:00

  • (4005) 제80화 한일회담(204)-박의장 방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64년11월11일 정오 2주간에 걸친 미일 방문길에 올랐다. 예의 짙은 선글라스를 낀 박의장은 공항에서 출국인사를 통해 『장구한 세월을 두고 미해결로 남아

    중앙일보

    1984.05.01 00:00

  • (4004)제80화 한일회담-김부장의 설득주효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방일은「박정희-지전회담』을 성사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한일관계 타개를 위한 혁명정부의 노력이 별 진전이 없자 김부장은 박의장에게 『혁명을 한 우리가 직접 저

    중앙일보

    1984.04.30 00:00

  • (4003) 제80화 한일회담(202) 김부장-수상밀담

    『한국의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이 도오꾜에 나타났다』이 짤막한 외신이 현해탄을 건너 서울로 날아들 때까지 국내에서는 김부장의 잠행을 깜깜 모르고 있었다. 박정희최고회의의장과 당시의 최덕

    중앙일보

    1984.04.28 00:00

  • 제80화(201)양국 대표단 대좌

    제6차 한일회담은 61년 10월20일 하오3시 도오꾜의 일본외무성 4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한국의 배의환수석대표와 일본의「스기·미찌스께」(삼도조)수석대표가 번갈아 가며 대표단을 소

    중앙일보

    1984.04.27 00:00

  • (4000) 제80화 한일회담-일의 실리적인 접근

    김유택경제기획원장의 방일은 당초 혁명정부가 의도했던 회담의 연내타결이라는 목표에는 접근하지 못했지만 양국간의 대화 무드를 상당히 고양시켰다. 김원장은 귀국후 기자회견에서『일본정부와

    중앙일보

    1984.04.25 00:00

  • (3998) 제80화 한일회담 (197)특사 외교로 돌파구

    한일회담의 연전속결을 위해선 청구권 문제에 대한 양국의 현격한 인식차 극복이 가장 선결과제였다. 군사정부는 통상적인 외교채널의 협의로는 청구권에 대한 현격한 견해차를 좁힐 수 없다

    중앙일보

    1984.04.23 00:00

  • (3996) 제80화 한일회담 (195)|회담재개 움직임 활발

    5·16으로 중단되었던 한일회담의 재개분위기가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한 것은 8윌 하순께부터였다. 이동환공사의 부임과 「마에다」일본 외무성 북동아과장의 방한으로 양국간의 외교채널

    중앙일보

    1984.04.20 00:00

  • (3995)제80화 한일회담(194)|한국통「마에다」방한

    일본정부는 61년8월6일 「마에다」(전전리일) 외무성 북동아 과장을 서울로 파견했다. 현재의 「마에다」 주한일본대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인천에서 나서 경성중학(지금의 서울고)와

    중앙일보

    1984.04.19 00:00

  • (3994)|제80화한일회담(193)-일이 꿍꿍이 속셈

    신임 이동환공사는 61년7월3l일 부인과 함께 도오꾜에 부임했다. 정부의 임명절차가 끝난지 보름만이었다. 원래 우리 외무부와 1주일정도 업무협의를 가진뒤 바로 현지로 출발하려했던

    중앙일보

    1984.04.18 00:00

  • (3993)제80화 한일회담(192) 기상천외의 제의|김동조

    군사 정부의 초기 대일 자세는 한마디로 「순진무구」로 표현해도 좋을 만 했다. 군사 정부 지도자들은 과거의 우리 대일외교가 자유당때는 고집, 민주당때는 무능 때문에 잘 되지 않은

    중앙일보

    1984.04.17 00:00

  • (3992)-제80화 한일회담(191)-상반된 자세

    군사정부는 한일문제에 대해 다소 성급하달 정도로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 젊은 군인들답게 한일문제를 단숨에 처리하려 들었다. 혁명 엿새만인 22일에 있은 김홍일외무장관의 내·외신 기

    중앙일보

    1984.04.16 00:00

  • (3991)-제80화 한일회담(190)-최고회의 브리핑

    5·16군사혁명이 난지 보름쯤후 태평로 국회의사당에 자리한 최고회의 회의실에서는 아침부터 진지한 브리핑이 진행되고 있었다. 장도영최고회의의장을 비롯한 최고위원전원과 김홍일외무부장관

    중앙일보

    1984.04.14 00:00

  • (3990)제80화 한국회담-김동조

    이제 민주당 정부의 한일관계 얘기를 끝맺기 앞서 자유당에서부터 민주당까지에 이르는 10년 교섭사를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민주당 정부의 8개월 남짓한 집권기간 중 한일교

    중앙일보

    1984.04.13 00:00

  • 제80화 한일회담(188)|봇물 터진 일본 붐

    『장면정권 아래서 주목된 한일관계의 하나는 종래의 배일정책의 반동으로 일어난 일본 붐이었다. 일본서적, 특히 문학작품의 번역이 대 유행을 이루었고 일본 가요의 레코드가 판매되는 한

    중앙일보

    1984.04.12 00:00

  • (3988) 제80화 한일회송(187)-청구권 줄다리기

    청구권위원회는 양측이 회의의 효율을 고려해△일반청구권소위원회 △선박소위원회 △문화재소위원회등 3개소위를 두었다. 유창순한은부총재(국무총리역임)및「니시하라」(서원직렴)대장성리재국장이

    중앙일보

    1984.04.10 00:00

  • (3987) 제80화 한일회담(186) 진전없는 회담

    민주당시절의 한일회담은 60년11윌7일 재일 한인 법적 지위 분과위회의 개최를 필두로 분 과위 활동에 들어갔으나 5·16이 나기까지 자유당 때의 4차례 회담 수준에서 맴돌거나 약간

    중앙일보

    1984.04.09 00:00

  • 제80화 한일회담|민주당 정권의 대 일 자세

    한일양국은 1960년에 다같이 정치적 격변을 겪어 정권이 교체됐다. 「기신 일본수상정권은 미일안보조약의 파동에 밀려「이께다」(지전용인) 씨에게 수상직을 넘겨주었고 우리나라에는 4·

    중앙일보

    1984.04.0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