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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출현한 무장 간첩
인지 사태의 비극적인 종말과 이에 고무된 김일성의 북경 방문과 남한 혁명 지원 호언 등으로 북괴의 군사적 도발 위험감이 여느 때 없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다른 곳도 아닌 한반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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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제자=김홍일|김성주의 기반구축
「로마넨코」사령부가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위장한 이후 소련군은 김성주를 앞세운 공산정권을 수립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소군 장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김성주를 「카렌스키·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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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대 김일성의 정체(상)|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진천보를 습격했던 동북 항일연군 제6사장 김일성이 죽은 뒤를 이어 그 이름을 승명했던 2대 김일성(연군 제1노군 제2방면군장은 1940년12월에 일만 군경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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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항일연군의 최후|이명영(성대교수 정치학)
항일연군 제1노군에 대한 섬멸작전인 동남삼성치안 숙정 공작은 그때까지의 일만 군경의「토벌」작전 중에서는 가장 본격적이고도 대규모의 작전이었다. l939년10월에 총공격이 시작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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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제자=김홍일)동북 항일 연군 내의 2대 김일성|2대 김일성의 입만과 군사 활동|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보천보를 습격했던 동북 항일 연군의 제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에 죽은 다음 한동안 김일성 부대의 활동 소식은 아무데서도 입수되지 않았는데 다음해 봄에 또다시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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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조작된 광복회 10대 강령
1925년 1월 소·일간에 수교조약이 체결되고 그 조약 속에 양국의 치안을 해치는 행동을 서로 금지한다는 규정마저 있어서 소련의 지원을 얻어 조국의 독립을 쟁취코자 했던 한인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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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항일 연군과 소련|이명영 집필(성대 교수 정치학)
동북항일연군의 행군대형은 언제나 일렬종대였다. 눈 내린 겨울 같은 때는 모두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밟아 꼭 한사람이 왔다간 것 같이 위장했다. 뿐만 아니라 맨 뒷사람은 일부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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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동북 항일 연군 6사단장|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소련으로부터 동만에 파견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에 속했던 김일성(김성주가 아님)이 1936년 4월께 제2, 5군 합작의 혼성부대 편성으로 액목 지방을 유격구역으로 할당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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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제자=김홍일|「김일성」이란 이름의 최초기록
만주의 중공당과 그 당군인 동군인민혁명군이 조작, 결성됨에 있어서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담당했던 역할은 매우 컸으나 그들 속에 김성주는 끼지 못했다. 동북 인민혁명군 속의 한인간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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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제자=김홍일|이홍광과 동흥사건
북한측의 주장에 의하면 김성주는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면서 1932년 봄부터 동해 일대에서 굉장한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1932년11월께 압록강·두만강 대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5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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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제자=김홍일-중공당·군내의 민족 차별
공산혁명에는 국경이 없고 「프를레타리아」앞에는 민족이란게 있을 수 없다던 「코민테른」지부 중공만의 한인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우와 태도는 어떠한 것이었던가. 과연 구위나 현위·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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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동북인민혁명군과 마적들
반석 중심현위는 자기 당 소속 유격대와 농민협회의 적위 대를 기반으로 하고 거기다가 만주사변으로 항일전선에 나선 구동북군(장학량)계의 군인들을 흡수하여 1932년 5월에 이통현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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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조선혁명군정부|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조선혁명군의 양세봉 총사령이 전사하자 그 후임으로 총사령에 오른 사람이 김활석(본명 문빈·또 하나의 별명 문무경)이다. 양세봉이 총사령으로 있을 때까지는 조선혁명당을 지도기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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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장군」 일수 없었던 김성주|이명영 집필
1932년2월 무송에서 조선 혁명군의 고동뢰 소대장 일행 10명을 참살하고 달아났던 김성주가 어디를 가나 발붙일 곳 없어 그해 여름 조선 혁명군 본부에 나타나 용서를 빌었을 때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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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8)-제자=김홍일|김성주 아닌 두 김일성
1930년(김성주 나이 18세 때)만주의 한인사회가 온통 공산당의 테러와 폭동으로 시끄러울 때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가진 두 청년이 있어서 각기 별개의 지역에서 공산테러에 앞장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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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장-5인의 「김일성」|이명영 집필 성균관대교수·정치학
한사람이 아닌 김일성-. 우리들에게 전설적으로 전해오던 김일성이 실존했었고, 그 이름을 도용하는 김일성이 있다. 그래서 이 글에「진위」와「열전」을 붙인다. 실존의 김일성도 한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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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야구 김용희
마치 농구선수와 같은 1m86cm위 장신에다 체중77kg. 이 거구에서 뿜는 타봉이 작년 고교야구 투수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금년 경남고교를 졸업한 김용희 선수(19)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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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제6화 가등청정의 볼모 일요상인 서한(2)|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27년만에 처음 받아 본 아버지의 글이었다. 경신년(광해12년·1620년) 5월7일자로 된 아버지의 이 편지를 받고서야 불효자식 일요상인은 즉시 (같은 해 10월3일자) 답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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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우방 참전부대(4)
태국정부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즉시 파병을 결정, 「아시아」우방으로서는 첫번째로, 「유엔」회원국으로서는 네번째로 빨리 한국에 출병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회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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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유격전(20)|민간유격대
6.25전쟁 중 적지가 된 여러 지방에서는 애향심과 적개심에 불타는 지방유지들과 청년들이 공산군이나 그 기관을 기습하는 등 산발적인「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은「유엔」군과 경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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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유격전(17)|백호부대(1)
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이 유엔군 총사령부에 보낸 작전보고에서 『백령도의 동키부대는 현재 미정친군 1개 사단에 맞먹는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와 같이 서해안 유격부대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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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6·25 21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아이크 집권과 내한(1)|등장의 배경(1)
1943년9월5일, 구주연합군 사령관 드와이트·아이젠하워 원수는 UPI통신(주=UPI의 전신)의 바질·핑크리 기자로부터 놀날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종군 특파원인 핑크리 기자는 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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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설과 실존에 관한 연구|이명영 집필
제1장 전설과 증언 및 그 평가 ①1907년 의병 때의「김일성」 ②1920년대의「김일성」장군 ③1919년 이후 만주의 항일무장운동 ④일본측의 증언 ⑤항일투쟁기록의 허점 일제의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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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건벽청야」작전(2)
(2) 문제의 「거창사건」은 1951년2월11일에 발생했다. 사단장의 「건벽청야」작전방침에 따라 이 지역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하던 9연대3대대가 거창군 신원면의 주민을 「통비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