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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서울에 여관이 많이 있는 이유는 …
1970년대의 서울 낙원동 여관 골목.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종로와 북촌 일대의 수많은 민가가 여관으로 등록했다. 그 후 많은 집이 폐업하거나 하숙집으로 전업했지만, 남은 집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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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셋방살이 설움’은 언제 시작됐을까
1971년 서울 청계천변의 판자촌. 한국전쟁 이후 서울 인구가 급팽창하면서 변두리는 어느 곳이나 무허가 판잣집들로 가득 찼지만, 이런 집들조차 식구 단위의 ‘안돈(安頓)’을 허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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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일본인에게 ‘뇌물’로 넘어간 숱한 문화재들
간송 전형필(1906~62)은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재의 반출을 막기 위해 전 재산을 기울여 가며 발버둥친 문화재 수호 역사의 ‘영웅’이다. 그러나 그와 경매장에서 맞선 상대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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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비만, 자랑거리에서 조롱거리로
1915년 매일신보에 실린 화평당약방의 ‘자양환(滋陽丸)’ 광고. “복용하는 데 따라 건강을 증가하고 차차 비만강장케 됨은 이 약이 제일”이라는 문구가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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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일본 황태자 방한을 앞둔 통감부의 호들갑
1900년께의 서울 도성. 일본 황태자 방한을 앞두고 급조된 성벽처리위원회는 수백 년간 서울의 원형을 표시했던 도성을 파괴해 버렸다. 일본인들이, 일본 황태자를 위해 진행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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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그 흔하던 회충·십이지장충 다 어디로 갔을까
1950년대의 떠돌이 약장수. 50년대까지 주로 ‘만병통치약’이나 ‘정력제’를 판매하던 약장수들도 6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구충제’를 집중적으로 팔았다. 이들은 구경 나온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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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인감증명제 실시 … 도장에 ‘인격’을 담기 시작하다
1926년 충남 홍성 한 도장포의 ‘인판(印版) 주문부’. 도장포 주인은 주문받아 새긴 도장을 주문부에 찍어 둔 뒤 한 달치씩 묶어 경찰서에 제출해야 했다. 주문부에는 제작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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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연애’의 탄생
1962년 세창서관판 『장한몽』의 표지. 『장한몽』은 ‘사랑과 돈, 주인공 사이의 삼각 관계’라는 현대적 연애 콘텐트의 기본을 갖추고 있었기에 여러차례 중간(重刊)됐다. 돈은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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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가마 대신 혼자 한 사람 옮기는 인력거 등장하다
20세기 초의 인력거. 챙이 좁은 갓을 쓴 젊은이는 인력거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웃고 있는데, 중절모를 쓴 길가의 청년이 아니꼬운 듯 쳐다보고 있다. 목적지에 빨리 도달할 양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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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비에서 침모로, 다시 식모를 거쳐 ‘가사 도우미’로
바느질에 열중하는 두 여성. 1920년대. 연출된 사진이어서 입성과 외모가 모두 깔끔하지만 재봉틀 뒤에 있는 사람이 주부, 그 옆에서 거들고 있는 사람은 침모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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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경성대학 교수회, 해방 뒤 첫 입시에서 국어를 빼기로 하다
1946년 7월 3일 경성대학 법문학부 제1회 졸업 기념 사진. 앞줄 한가운데가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이며, 그 좌우에 선 이가 조윤제 법문학부장과 안스테드 총장이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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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3색의 교통신호기가 사람의 행동거지를 규제하다
경부철도 개통 직후인 1906년께의 철도 건널목. 간수가 길 건너편에 매놓은 긴 줄을 잡아당겨 인마(人馬)의 통행을 막았다. 그로부터 30여 년 후, 이 일은 전기신호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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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남성들의 공간’인 시장에서 여성들이 주인 되다
1900년께 남대문시장. 행상이 때에 맞춰 모여들었다 흩어지는 곳을 ‘장’이라 하고, 점포가 줄지어 늘어선 곳을 ‘시’라 한다. 시장이란 시와 장이 함께 있는 곳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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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농민 돈 갈취하는 수단으로 악용된 최초의 소 보험
1900년께의 경기도 봉일천 우시장. 농가에서 보험료를 걷던 대조선보험회사가 철폐된 뒤 1898년 새로 설립된 우척(牛隻)보험회사는 우시장에서 소를 사고파는 사람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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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탕수육과 자장면 …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의 창작품
1920년께 서울의 중화요릿집. 간판 밑에 현대식 중화요리라 쓴 천조각을 내걸었다. 아마도 당대의 ‘퓨전’ 중화요리를 의미한 것이리라. 얼마 전만 해도 아서원·대관원·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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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대를 잇기 위한 양자제도가 되레 가족관계를 망치다
19세기의 제사 장면. 서자는 장남이라도 제주(祭主)가 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유산 상속은 제사 상속에 따라붙는 권리였다. 적자(嫡子)가 제사를 통해 가계(家系)를 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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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일제의 쌀 반출로 더욱 간절해진 ‘이밥’에 대한 열망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군산항(1920년대 엽서에 실린 사진). 일본이 조선쌀을 다량 반출해 감에 따라 한국인의 쌀 소비는 크게 줄었다. 더불어 쌀에 대한 갈망도,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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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포경수술 … 전쟁 중 시작된 한국 남성의 ‘통과의례’
6·25 전쟁 중 미군 이동외과병원의 수술 장면. 할례는 본래 유대인의 종교행위였으나 1930년대부터 의료 행위가 됐다. 오늘날 다수의 한국 사내아이들은 태어난 직후,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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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나타난 지 한 세대 만에 힘 잃은 ‘평생 직장’ 개념
휴전 직후, 전쟁터에서 한팔을 잃은 청년이 구직(求職)이라고 쓴 표찰을 가슴에 걸고 하염없이 서 있다. 외환위기 전까지 직업은 생계수단일 뿐 아니라 ‘정체(正體)’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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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안방 차지한 TV 수상기, 가족 관계를 바꾸다
1970년께 한 가정집 안방의 TV 수상기. 가족 구성원 전부에 이웃집 식구까지 TV 앞에 모여 앉아 있지만, 시선은 한 방향이다. TV 앞에서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