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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36. 신천지
▶ 원주 육민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1953년 서울로 올라온 필자. 원주의 육민관(育民館)중.고교. 서울대 예과 때 내려와 젊음을 한껏 불태웠던 시골학교다. 반년 정도 있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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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36)
산아 무너져라 그 밖좀 내다 보자 바다야 넘쳐라 심심허도 않으냐 -공초 산 같은 사람, 바다 같은 사람이 세상에는 있다. 운성(雲城) 구상은 공초(空超) 오상순을 '우리 시대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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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 못온 부모 초청 군부대서 체험행사 열어
강원도 인제 을지부대 보급수송대대는 가정형편 등으로 군복무 중인 자식을 한번도 면회하지 못한 부모들을 초청,지난 13∼14일 이틀간 부대생활을 체험케 했다. 부대를 찾은 장병 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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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음] 오계칠 한국식물학회회장 별세 外
▶오계칠씨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식물학회회장) 별세, 오종식 (LG생산기술원 책임연구원).경식씨 (서울대 신소재공동연구소 특별연구원) 부친상, 윤기종씨 (단국대 섬유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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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보처.국민고충처리위.경찰청.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공보처^방송제작2과장 李昌浩^영화제작과장 都相璿 ◇국민고충처리위^국장 南顯祐^민원기획과장 洪春義^서무과장 蔡昭夫^분류심사과장 朴在赫^조사총괄과장 金均培^조사1과장 李永烈 ◇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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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부 선생 재조명 활발
○…한학자며 철학자로서 많은 일화·기담을 남긴 범부 김기봉씨 (1897∼1966) 의20주기를 맞아 그의 사상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범부 선생 유고간행회 (회장 이종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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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4)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27)묵로 추도회
내친김이니 정재가 묵로의 아들이 되어 묵로의 제사를 지낸 이야기를하고 묵로와 정재의 우정이야기를 끝맺기로 한다. 내가 정재와 동대문시장에서 만난뒤 얼마안되어 정재는 고물상을 집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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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해주오씨, 조선조 정승 2·문과급제자 98명 임신·병자난서 3대가순국청과 화해 거부한 오달제 충절 빚나
오씨는 인구순위로 우리나라 13번째 대성이다. 전국에 60여만명. 그중 50여만명이 해주오씨. 그러나 그밖의 오씨들도 해주와 한뿌리로 믿고있다. 해주오씨의 시조는 고려 성종조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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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냄새 풍겨 못마땅
김비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의 잘못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너그럽지 못한 나의 성미때문에 나는 부석해진 김비서의 얼굴과술냄새로 『또 술마시고 늦었구나』하고 바로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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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쏟아지는 「1점차 희비」
83년도 남자실업농구코리언리그 1차전은 연일1점차로 승부가 엇갈리는 희비극이 연출되는 가운데 해룡이 꽤조의 3연승으로 단독선두에 나섰다. 해룡은 17일 문화체육관에서 벌어진 3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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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 집턴 두 피고인 징역10∼3년 선고
서울고법 제3형사부(재판장 이한구부장판사)는 15일 이·장사건의 장영자피고인(38)집에 들어가 금품을 턴 김용철(42)·오종식(30)등 두 피고인에 대한 특정범죄 가중처벌법등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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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씨 부부 돈 받은 경관 8명 면직조치
거액 어음사기사건으로 구속된 이철희·장영자 부부로부터 경찰관들이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관련 경찰관 8명이 면직됐다.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사기사건을 수사중인 당국은 12일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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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삼공화국『국가재건 최고회의』⑤
최고회의는 방대한 권력기반 위에 섰다. 어느 곳의 통제도 받음이 없이 입법과 행정권을 장악했고 혁명재판을 통해 사법권의 일부도 행사했다. 그러나 역시 군정이라는 데서 그 성격은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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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60년(제67화)
광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차 안정을 되찾아가던 우리나라 영화는 1950년6월25일의 사변으로 다시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영화인들은 전쟁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 영화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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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농구 「스카우트」 마무리
남자실업농구연맹의 올해가등록 2차마감을 3일앞두고 5개실업 「팀」은 산은을 제외하고 2명씩선발, 올해 「스카우트」를 마무리지었다. 이로써 내년졸업예정 대학선수는 모두18명이 취업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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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3)제58화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 비사|50년대"문예"지 전후-조광현(46)
나의 문단생활은 주로 8·15해방과 함께 시작된 것이지만 해방이후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미 작고한 선배와 문우들이 상당히 많다.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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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5)|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 밀사-50년대 문예지 전후 (8)|「문예」지 창간|조연현
「문예」가 창간된 것은 l948년의 8월이었다. 어느날 모윤숙 여사의 연락을 받고 김동리씨와 함께 만났는데 순 문예지를 내는데 필요한 자금을 낼테니 잡지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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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2)|제58화 문학지를 통해본 문단비사-40년대 「문장」지 주변 (61|몰려온 연대생|정비석
l960년4월19일. 4·19학생 「데모」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가자 나는 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거의 매일같이 거리로 달려나와 학생들의 동태를 세밀히 관찰하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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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종식씨 영결식 2백여 명 참석 애도
언론계의 원로 고 석천 오종식씨의 영결식이 28일 상오10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서 언론계·정계 등 평소 고인과 가까 왔던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영결식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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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식씨 빈소에 박 대통령, 조의 표명
박정희 대통령은 27일 임방현 대변인을 고 오종식씨 빈소에 보내 조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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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백과 신념으로 산 일생
항상 일선 기자들에게『기백과 신념이 가득 찬 지사정신을 잃지 말 것』을 강조한 원로 언론인 석천 오종식 씨의 30년 언론계 생활은 한마디로 외곬인생이었다. 1906년 경남동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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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오종식씨 별세
언론인 석천 오종식씨(사진)가 26일 상오6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527의54 자택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오씨는 24년 일본동양대학을 졸업, 48년 사회부차관을 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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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건회사서 잠시|오종식 (전 언론인),
서울에 있는 토건회사 지배인으로 있었다. 해방되던 날 당시 함흥에 있는 장인면회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기차안에서 듣고 알았다. 군용차안에서 일본군인이 긴칼을 빼든 채 침통한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