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289)|개성의 함정(1)|휴전회담의 개막(3)

    1951년7월8일, 쌍방군사령관의 합의에 따라 10일에 열리는 휴전회담 제1차 본회의를 준비하기 위하여 양측 연락장교들이 개성근교의 내봉장(주=6·25전 이현재씨의 개인저택)에서

    중앙일보

    1972.02.11 00:00

  • (288)|휴전 회담의 개막-전반부(2)|말리크 시의 배경(2)

    미 행정부 요인이 처음으로 38선 휴전에 동의를 비친 것은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리」가 한국 휴전을 종용한 바로 다음 날인 1951년6월2일이었다. 이날 한국 전쟁과는 여러모

    중앙일보

    1972.02.09 00:00

  • (282)적의 춘계공세(11)

    (8) 우리 나라의 참 모습을 널리 해외에 알리는데 있어 백명의 대사보다 더 많은 몫을 했다는「리를·에인절즈」는 기실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현리전투에서 탄생했다. 전쟁에서 몇

    중앙일보

    1972.01.26 00:00

  • (275)적의 춘계공세(4)

    적의 춘계 공세가 시작될 때 한국군은 도함 9개 전투 사단이 전선에 배치돼 있었다. 서부의 미제1군단 산하에는 국군 제l사단(사단장 강문태 준장)이, 그 우측의 미 제9군단에는 제

    중앙일보

    1972.01.10 00:00

  • (273)적의 춘계공세(2)

    (1) 영국이 한국전쟁에 대해 취한 태도는 매우 「아이러니컬」했다. 「런던」정부는 「유엔」결의에 호응하여 재빨리 한국전에 1개 보병여단과 2개 포병대, 그리고 10여척의 군함을 파

    중앙일보

    1972.01.05 00:00

  • (307)정중여산-무겁고 조용하기 산과 같이 하라

    11월27일부터 12월4일에 이르는 8일동안 중서부전선에서는 창군이래 최대의 동계기동훈련 『승진 71호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 『승진 71호 작전』은 제○군단장 이병형 육군중장

    중앙일보

    1971.12.04 00:00

  • (254)|맥아더 원사 해임(3)

    웨이크도 회담의 성격이나 목적에 대해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원사는 서로 상반되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전자는 맥아더가 마땅히 워싱턴에 와서 대통령에게 군무를 보고해야 되지만 하

    중앙일보

    1971.11.17 00:00

  • 겨울 전방…월동 준비완료

    「휴전선국군전담」이후 처음 맞는 겨울철 전선은 적이 발붙일 수 없는 빙벽 같았다. 북한강 상류에서 동해안으로 뻗은 육군○군단예하 전선은 국군전담의 방어의지가 4반세기 동안 서려있는

    중앙일보

    1971.11.15 00:00

  • 우익 20여단체 조건부 삼가결정

    전후 처리를 싸고 구체적인 대안이 없이 공위에 마주앉았던 미·소는 5호 성명에서「주장의 본깃점」에 이른 것이었다. 사태가 악화되자「하지」증강파 「아널드」는 우익지도자 중에서 온건한

    중앙일보

    1971.11.05 00:00

  • 무형문화재 47호로 지정된 조궁명인 권영록씨

    현대식 총기가 생기기 이전 활은 바로 총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문명에 쫓겨 사라진 오늘날 활은 재래기예의 하나로 남아있을 뿐, 전국체전의 한 종목이 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중앙일보

    1971.09.27 00:00

  • 3국 주말외화

    TBC-TV는 12일 「일요극장」(밤11시15분)에 『나선계단』(원제 The Spiral Staircase)을 방영한다. 1945년도 「셀즈닉」사 작품.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일어

    중앙일보

    1971.09.10 00:00

  • (222)|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4)|「도드」준장의 피랍(3)

    「마크·클라크」대장은 공산포로들에게 굴욕적인 양보를 하고 「도드」준장이 석방된 지 이틀만인 5월 12일에 「매튜·B·리지웨이」대장으로부터 「유엔」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이어받았다.

    중앙일보

    1971.09.01 00:00

  • (234)|한-미 합동첩보비화「6006부대」(13)|윤일균

    오늘은 이미 기록한 한-미 합동항공첩보작전에 의해 수집된 귀중한 첩보가 정보 화하여 실지 항공작전 면에서 어떻게 이바지했는가를 미 공군의 활동을 통해 적어보기로 하겠다. 6·25

    중앙일보

    1971.08.18 00:00

  • (213)-(5)6·25 21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5) 북괴는 일반 미군 포로 수용소에 보내달라는「딘」소장의 요청을 거부하고 홀로 격리수용생활을 시키면서 위협과 회유를 되풀이한다. 꼭 3년10일간 북한에 억류돼있는 동안 장군이

    중앙일보

    1971.08.11 00:00

  • (212)남과 북의 포로수용소(4)

    (4) 괴뢰 4인조장교들은 「딘」 소장이 감시병의 따발총을 뺏어 김 총좌를 죽이고 자기도 자살하려고 하자 장군에 대한 심문과 고문을 중지한다. 「딘」소장의 이와 같은 마지막 시도는

    중앙일보

    1971.08.09 00:00

  • (227)제16화 한·미 합동첩보비화「6006부대」(6)

    38선 이북 동해와 서해의 수많은 섬 치고 6·25동란 때 특수해상도서작전에 참가한 용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육지의 전선은 훨씬 밑으로 처져있었으나 바다에서는 평북

    중앙일보

    1971.08.09 00:00

  • (59)미주 이민들의 사랑방…「파르케·샹하이」거리(22)

    「브라질」의 최대도시 「상우파울루」시의 도심지에 「파르케·샹하이」란 거리가 있다. 「마르케·샹하이」란 「상해공원」의 뜻 그대로 예전엔 공원 땅이었으나 지금은 일본이민을 비롯한 동양

    중앙일보

    1971.08.09 00:00

  • (211)남과 북의 포로수용소(3)

    (3) 김총좌를 장으로 하는 4인조의 괴뢰장교들은 그들의 상관인 정치보위부 책임자 박하세 소장을 만난 후부터 「딘」소장에 대해 본격적인 심문과 고문을 시작했다. 「딘」장군은 너무나

    중앙일보

    1971.08.06 00:00

  • (209)「6·25」21주…3천여의 증인회견·국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딘 소장의 고난(1)|남과 북의 포로 수용소(1)

    한국 전쟁은 여러 가지 면에서「통상 전쟁」과는 다른 점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포로 문제는 그 대표적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남과 북의 포로 수용소도 포화가 불꽃튀

    중앙일보

    1971.08.02 00:00

  • (200)38선돌파와 북진(16)

    (중) 북한수복지역의 군정은, 미8군 관할지역과 미10군단지역과는 그 체제나 실시방법 등에 있어 좀 달랐다. 원래 미10군단은 재한 미지상군 사령관인 「월튼·워커」중장의 지휘를 받

    중앙일보

    1971.07.12 00:00

  • 6·25 스물 한 돌「세계의 벽」을 말한다|체험세대와 동란동이의 좌담

    6·25를 몸소 치른 세대와 6·25가 터지던 해 세상에 태어난 세대가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적 치하 90일의 고난을 겪은 대학교수와 직접 적과 맞부딪쳐

    중앙일보

    1971.06.25 00:00

  • 금연은 가능하다|미 암 협회의 효과적인「담배끊는 법」

    「라디오」·TV에 담배광고가 전면 금지된 것은 금년부터의 일. 대신 미국 암 협회의 금연 광고가 방송됨으로써 사실상 담배의 유해 논쟁은 결말이 났다. 미국 암 협회의 최근 보고에

    중앙일보

    1971.06.21 00:00

  • 불황극장가에 우수 외화 러쉬

    이번 주말을 기해 서울시내 4개 극장에서는 4편의 해외「스팩터클」모든 문제영화들이 일제히 개봉돼 한산하던 극장가는 활기를 되찾았다. 지난 2월 영화진흥조합이 발족한 이래 그 과도기

    중앙일보

    1971.06.19 00:00

  • (188)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38선 돌파와 북진(4)|평양으로(1)

    북한작전의 압권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적도 평양의 탈환이었다. 각부대가 모두 앞을 다투어 평양 1번 돌입의 영광을 차지하려고 눈에 핏발을 세운 것은 당연했다. 이 점은 한국군이나

    중앙일보

    1971.06.1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