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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만에 처음 공개하다
이 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발발 33주년―. 수도서울을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치욕적인 후퇴와 후퇴의 거듭끝에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보루로 서울수복까지 고난과 파란의 전시국가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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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다 졸업하자마자 연합회서 활동|피난 중 박에스더씨 주선으로 미 유학
대학생과 분리하여 Y부를 두면서 그 첫 행사로 53년 여름 부산 영도의 연세대 가교사에서 하령회를 가졌던 이야기는 앞에서 한 바 있다. 대학생도 같은 해에 Y팀보다 며칠전 하령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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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복구·방역 철저히|이재민학생 학비 면제"
전두환 대통령은 일요일인14일 상·하오에 걸쳐 태풍「오키드」호로 큰 피해를 당한 경남 하동·밀양군과 경배의 월성·경산군의 복구사업 현장을 돌아보고 작업중인 주민들을 격려했다. 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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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전시의 문화인들(6)|해군종군작가단
대구에 피난 온 문인들이 공군과 육군종군작가단을 만든 지 얼마 안되어 부산항도의 문인들은 해군정훈감실에 모여 해군작가단을 만들었다. 해군작가단의 경우 해군본부가 부산에 있는데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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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지원작전(13)병기(1)
1억4백13만6천8백48발. 이것은 6·25전쟁 첫 1년 동안에 우리 한국군이 소모한 M.1실탄의 숫자로「지연」과「총반격」작전에서 탄약은 실로 무제한으로 소모됐다. 「병기」는 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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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지원작전(3)|군수보급(3)
부산항에 산적된 미 군수물자들은 다시 육로와 해상을 통해 신속히 전방으로 수송 됐다. 한국군에 대한 수송·보급은 주로 우리 육본 군수 국과 해군수송선들이 담당, 추진했다. 인사(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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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하늘의 전쟁(15)|제한된 임무 수행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미 극동공군은 한국전쟁에서도 『제한된 사명』을 훌륭히 완수하였다. 1944년 6월 15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창설된 미 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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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하늘의 전쟁(7)
(1) 조종사와 정비사는 바늘에 실이 따르듯 부부와 같은 일련돈생의 관계. 전자가 양지에서 화려한 각광을 받는 것은 그 뒤 응달에서 묵묵히 정비에 피땀을 흘리는 후자의 각고가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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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휴전회담의 개막(22)「6·25」21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
휴전회담은 1952년 2월 6일부터는 제5항의 관계국정부에 대한 건의사항토의를 개시함으로써 미해결의 의제 제3, 4, 5항을 모두 각 분과 위원회에서 동시에 다루게 되었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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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유엔군의 총퇴각(4)|평양철수(3)
피란 길에는 으례 여러 비극이 뒤따르게 마련이지만 평양철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 당국에서 민간인의 철수계획을 마련하지 못해서 큰 혼란을 빚어냈다는 것은 전회에서 밝힌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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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 초 계기 추락
【대구】31일 상오 11시15분쯤 훈련 비행 중이던 공군 소속 S-2A 해상 초 계 정찰기가 기관 고장을 일으켜 대구시 불로 동 1구 955 곽무순씨(47) 집 사과밭에 떨어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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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제16화 한·미 합동첩보비화 「6006부대」(9)
북한괴뢰는 6·25동란 중 6006부대와 한국 공군 특무부대 합동 특수작전에 의해 MIG15기의 중요부분을 백주에 탈취 당하는 가하면 전선에 투입하려던 후방부대가 궤멸되는 등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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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한·미합동첩보비화 「6006부대」
인류역사상 최초로 공중정찰을 시도한 사람은 「노아」다. 성서에 보면 「노아」가 「대지의 표면에서 홍수가 다 가셨는가를 알기위해 비둘기를 달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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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남과 북의 포로수용소(3)
(3) 김총좌를 장으로 하는 4인조의 괴뢰장교들은 그들의 상관인 정치보위부 책임자 박하세 소장을 만난 후부터 「딘」소장에 대해 본격적인 심문과 고문을 시작했다. 「딘」장군은 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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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한·미 합동 첩보 비화-「6006 부대」(2)|윤일균
1950년8월 초순께, 낙동강 전선에서 피아간에 촌토를 빼앗거나 지키려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무렵 미 극동 공군사령부에서 「네코」 부대에 한 장의 지령이 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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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낙동강아 잘 있거라(2)|8군의 총반격(2)|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 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낙동강 교두보를 공격하던 북괴군 13개 사단은 9월16일부터 전개된 미 제8군의 총반격에 맞서 18일까지는 일진일퇴의 격돌을 되풀이했지만, 19일부터는 점차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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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 3단계 폭력 전술
중앙정보부는 9일 상오 일본을 거점으로 예비역 장교들을 포섭, 오는 5월부터 8월 사이에 서울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다 일본 경찰에 자수한 북괴 간첩 고영호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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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워싱턴과의 논쟁 (1)|인천 상륙 (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해리·S·트루먼」미 행정부가 북괴의 남침 후 한국 문제에 관한 정책을 우선 결정하고 그 후에 「유엔」의 추인을 받은 것과 비슷한 경우가 실제 전쟁 지휘에 있어서 현지 군사령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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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맥아더의 집념(2)|인천 상륙(2)|6·25 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1945년8월30일 일본의 후목 비행장에 첫 발을 내디딘 맥아더 원수는 『「멜버른」 (호주수도) 서 동경까지의 길은 멀었다』고 말함으로써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의 연합군이 겪은 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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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낙동강 공방전(8)|동부전선(5) 「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적, 포항에 제2차 공세
북괴군 제5사단은 적의 9월 공세에 앞질러 8월28일에 포항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원래 이 5사단은 8월 공세 때 영덕·강구에서 국군 제3사단에 중압을 가하여 장사동에서 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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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낙동강 공방전(6)|「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동부전선(3)미군 탄약 훔쳐 싸우기도
8월16일 장사동에서 구룡포까지 해상으로 철수한 제3사단은 숨쉴 사이도 없이 17일에 포항시방어전에 다시 투입되었다. 포항이 적수 중에 영영 들어가게 되면 낙동강교두보에 대한 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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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군 소좌 미그 15기로 귀순|공군기 유도, 거진 해안에 동체 착륙
3일 하오 2시27분 북괴 공군 소속 박성구 소좌 (32·북괴 공군 824 부대 소속)가 「미그」 15기 (기번 239호)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 간성 북쪽 5㎞ 지점인 고성군 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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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대전의 25시(10)|미24사단의 혈투(4)|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역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북괴군은「딘」소장이 처음 판단한 것처럼 점령한 제 2사단과 대평리 정면의 제3사단, 논산으로 돈 제4단, 그리고 주력을 공주 쪽으로 옮긴 제 105 탱크사단의 4개 사단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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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전의 25시(9)|미24사단의 혈투(3)|「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미 제24사단의 21연대가 조치원을 포기하고 후퇴한 다음 날인 7월13일에「워커」중장은 「맥아더」원수의 명령에 따라 한국에 있는 모든 미 지상군의 작전지휘권을 인수했다. 대구에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