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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념보다 진한 우정…자식이 되찾았다|진도 김영원 회장-미하일강|두 집안의 우정과 분단44년

    44년만의 해후였다. 해방되던 45년 평양에서의 선록이 서울과 모스크바를 잇는 보은으로 다시 이어졌다. 남-북 분단과 한-소 냉전이 두 가족의 정을 갈라놓은 지 44년. 이제 그

    중앙일보

    1991.09.18 00:00

  • (4508) 제86화 경성야화(43) 조용만

    대관원근처 관수동 일대에는 중국상점이 많고 중국사람도 많이 살고 있었다. 지게꾼들을 부추겨서 중국상점을 부수라고 하는 것인데 지게꾼들은 중국상인들하고 가까운터라 까닭없이 해칠 생각

    중앙일보

    1991.09.16 00:00

  • (4507) 경성야화(42) 「충무공 산소 경매」사건

    나는 당시 중국문학과 조선문학강의시간에 교실이 텅 비눈 것이 안되어서 2학년이던 김태준과 의논하고 둘이서 이 시간에 출석하기로 하였다. 김태준은 지난해에 이 과목을 청강했던터라 가

    중앙일보

    1991.09.14 00:00

  • 조선민주당 창당(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8)

    ◎김일성 고당에 「허수아비 정당」간청/「결사의 자유」선전하려 정략적 이용/공산당 책임비서로 내정되자 “발뺌” 해방후 북한의 두 지도자 조만식과 김일성은 상당기간은 외형상으로나마 원

    중앙일보

    1991.09.12 00:00

  • (4505) 경성야화(40) 경성방송국

    1927년 2월에 경성방송국이 생겨서 전국적인 방송이 개시되었다. 그때까지는 방송이라는 말자체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외국에는 방송국이 있어서

    중앙일보

    1991.09.11 00:00

  • 조만식과 소 군정(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7)

    ◎겉으론 협력 속으론 갈등/이북5도 대표협 결성… 통치기구 정비/고당 “손은 잡되 소 잘못땐 비폭력 저항” 소 군정과 조만식의 관계는 미묘했다. 해방이 됐으니 자주독립국가를 세워야

    중앙일보

    1991.09.09 00:00

  • 김일성 환영대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소 훈장달고 소서 준 원고 낭독/「전설의 노장」기대한 군중들 “웅성웅성”/“가짜다” 소동 일자 소련군이 총 쏘기도/증언자 박길용씨 박재창씨 해방 두달이 지난 45년 10월14일

    중앙일보

    1991.09.05 00:00

  • “북송교포는 이민족 취급”/귀순 김수행씨 일문일답

    ◎돈대줄 일 친척 없으면 바닥생활 『감격스러우면서도 두고온 가족이 걱정돼 마음이 착잡하다』고 귀순소감을 밝힌 김수행씨는 『방금 서울에 도착했지만 확실히 「북조선」에서 듣던 바와는

    중앙일보

    1991.09.04 00:00

  • 김일성 대일 해방전 참가 못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

    ◎입북전후 뭘했나/“참전한걸로 해달라” 소 지도부에 간청/45년 9월 소군 대위로 원산항에 도착 해방 한달쯤 후인 45년 9월19일 오전 원산항 앞바다에 소련군함 1척이 조용히 들

    중앙일보

    1991.08.26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92 제86화 경성야화-27

    1920년대 당시 종로 청년회관에서는 강연회니, 성토회니 하는 집회가 자주 열리고 있었다. 1920년 서울에 최초로 「조선노동공제회」라는 노동운동단체가 설립되어 『공제』 라는 기관

    중앙일보

    1991.08.19 00:00

  • 45년간 남편 머리카락 고이 간직

    『비록 비명에 돌아가셨지만 이제라도 국립묘지에 안장되면 그분에게도 위안이 되겠지요.』 고당 조만식선생의 미망인 전선애여사(88)는 17일 정부가 고당 선생의 유택을 국립묘지에 마련

    중앙일보

    1991.08.19 00:00

  • 소정치장교/입북전 김일성 「면접」(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

    ◎소의 선택과정/당시 88여단 대대장… 베리아 추천설도/김용범·최용건·김책·강건도 “지도자감” 주목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45년 8월하순 하바로프스크에 있던 25군정치장교 메크레르

    중앙일보

    1991.08.19 00:00

  • 육당 최남선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육당 최남선이 1920년 9월에 열린 공소공판에서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그런데 복역 중 뜻밖에도 만기출소 7개월 전인 1921년 10월에 가출옥으

    중앙일보

    1991.08.15 00:00

  • 소,조만식 대통령 구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

    ◎45년 10월 “고당 제거” 정보입수… 김일성 불러 호통/소 정치장교/“찬탁” 설득하면서 제의/김은 군사책임자 내정 조만식에 대한 소련측의 관심은 특별했다. 그것은 당시 고당의

    중앙일보

    1991.08.14 00:00

  • 소,꼭 「김일성집권」 아니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

    ◎연재를 시작하며/통일의 길목 역사복원 분단의 반세기는 우리 민족엔 인고의 역사이자 왜곡의 역사였다. 열강의 손으로 그어진 장벽의 뒤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위한 사실의 변조와 진실의

    중앙일보

    1991.08.12 00:00

  • 인기 있었던 『백조』

    4학년 우리 반 친구 중에 유원성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이 친구의 할아버지가 유명한 유대치의 아우였다. 1학년 때 어느 비 오는 날 기골이 강대하고 심하게 얽은 노인 한 분이 교실

    중앙일보

    1991.08.12 00:00

  • |호떡집

    1920년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되던 해에 동아일보가 나왔다. 새로 온 사이토(@등실)총독이 조선사람들한테 신문을 발행하도록 허가를 해서 동아·조선·시사신보등 3개 신문이 동시에

    중앙일보

    1991.08.10 00:00

  • 경성야화

    총독이 바뀐 다음 몇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우선 모자에 붉은 테를 두른 헌병 학교 선생을 포함한 문관들이 금테 모자에 검은 제복을 입고 주체하기 힘든 긴 칼을 차고 다니던 모습

    중앙일보

    1991.08.08 00:00

  • 규모 엄청난 명13능

    청춘의 나이에 벌써 자기의 유택을 장만하기에 모든 정력을 쏟는 경우가 그것이다. 진시황도 그랬지만 명의 신종(만력제)도 그랬다. 그는 재위중 우리나라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서 구원군을

    중앙일보

    1991.08.07 00:00

  • (4483)경성야화(18)

    정치 이야기는 잠시 쉬고, 그 당시 우리들의 생활은 독립만세이후 옛날 구식생활에서 차차 벗어나 서구나 일본식으로 개화돼 가기 시작하였다. 그 한 예로 취미·오락 방면의 이야기를 한

    중앙일보

    1991.08.03 00:00

  • (4480)경성야화(15)이용만|탑골공원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많은 보물을 약탈해 갔다. 그때 이 아름다운 흰 대리석으로 된 13층 석탑이 탐나서 일본으로 집어가려고 우선 꼭대기 3층을 땅으로 내려놓았다

    중앙일보

    1991.07.29 00:00

  • (4479)|경성야화(14)조용만|독립선언문

    학생들이 공원 대문을 나와 동대문·종로 쪽으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 행렬을 보고 박수를 보냈다. 거리가 온통 흥분의 도가니 속이었다. 나는 겁이 나서 동무들과

    중앙일보

    1991.07.27 00:00

  • (4477)제86화 경성야화(12)|조용만|칼 찬 일본교사

    할아버지는 일본사람을 『왜놈, 왜놈』하면서 몹시 미워하고 계시던 터라 일본말을 왜 「국어」라고 부르고 일본을 왜 「우리나라」라고 해야 하는지 내가 만약 그 이유를 묻는다면 당장 화

    중앙일보

    1991.07.24 00:00

  • (4476)| 경성야화 (11)|보통학교|조용만

    나무를 살 사림이 먼저 가격을 얘기하면 중도위가 그 조건에 맞는 나무장수에게 접근해서 값을 묻고 흥정한다. 비싼 것은 장작, 그 다음이 솔 나무, 제일 싼 것은 잡목 잎사귀를 큰

    중앙일보

    1991.07.2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