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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과 소 군정(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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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겉으론 협력 속으론 갈등/이북5도 대표협 결성… 통치기구 정비/고당 “손은 잡되 소 잘못땐 비폭력 저항”
소 군정과 조만식의 관계는 미묘했다.
해방이 됐으니 자주독립국가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완강한 민족주의자 고당과 변경국가를 소비예트화하려는 소련군사이에는 처음부터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해방군으로서 진주한 소련군은 그들의 「비밀의 대안 김일성」과 그의 빨찌산조직을 통해 북한의 장악에 나섰지만 이미 조만식은 주민들의 절대적 후광속에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운명을 가르는 신탁통치문제가 제기될때까지 소련군정과 조만식은 협력과 갈등의 복잡한 정치방정식을 연출해갔다.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은 8월29일 평양주둔 소련군 25군사령부에서 조만식과 처음 대좌했다.
조만식은 그에 앞서 26일 치스차코프 사령관(작고)과 만났다. 소련군정과의 관계정립을 위한 것이었다.
조만식은 치스차코프에게 『소련군은 점령군이냐,해방군이냐』고 말했다. 당시 소련군의 행패나 약탈행위는 해방군으로서의 소련의 체면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치스차코프는 『나는 순수한 군인일뿐』이라며 정치문제는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에게 물어보라고 미뤘다.
레베데프는 조만식이 북한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미 잘알고 있었다. 그는 『조만식이 인민들로부터 추앙을 받고있다는 정보를 부임전부터 갖고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기본노선엔 시각차
『먼저 북조선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얘기해달라며 말을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친일파의 준동,산업활동의 중단,식량부족,토지제도미비,그리고 문맹자문제 등이 산적해있다」고 설명하더군요.』
레베데프는 이 민족주의자와의 만남을 아직도 잊지않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더니 거침없이 대답하더군요.
기본정치노선은 민주주의여야하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제도를 채택해야하며 교육을 통해 인민을 깨우쳐야 하고 피압박민족의 한을 자주독립국가로 풀어야하고,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등이 보장돼야한다고 말입니다.』
레베데프는 『당시 조만식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었다』고 회고하면서 『그는 정치적 식견이 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레베데프는 증언이 끝날무렵,왼손을 머리위로 올리고 오른 손으로 허리부분을 가리키면서 조만식이 왼손의 위치라면 김일성은 오른손위치라고 비유해가며 두사람의 인물역량을 비교까지 했다.
그러나 레베데프와는 달리 소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대장은 76년 소련과학아카데미동방학연구소에서 발행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조만식에 대한 첫 인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레베데프사령관이 인민위원회대표들과 가진 회담에서 조만식은 반동적인 견해를 가졌지만 새조선의 정권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두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면서 입을 다문채 이따금 찬성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반대의 표시로 고개를 옆으로 젖기도 했다. 그는 말을 적게 할 수록 권위가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듯 허세를 보이면서 참석자들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으로 처신했다. 이 회담에서 통역은 준비된 정치활동가 박정애가 맡았다.』
그러면 조만식의 소군정에 대한 기본인식은 무엇이었을까.
해방당시 조만식선생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박재창씨(77·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고당선생님이 꼭 그렇게 생각하셨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시 소련에 대해 절망적으로는 보지 않았던게 전반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박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일부에서는 고당선생님이 소련군정과 함께 일을 한 것을 놓고 「국제적인 식견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견해는 단견이라고 봅니다.
막강한 소련군대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는 없는 것이고,그렇다고 남쪽으로 내려와버리면 북한을 그대로 소련에 진상하는 꼴이 돼버린다고 고당은 판단했던 것입니다.
○“무력대항은 무모”
그래서 일단 소군정과 함께 일을 하되 잘못된 점에 대해선 비폭력으로 저항하자는 것이었죠.』
이 대목에 대한 북한문제전문가 김남식씨(66·평화연구원연구위원)의 견해.
『당시 모든 정치상황이 서울에 집중돼 북한에 있던 민족주의세력이든 국내파 공산주의자든 서울동향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고당은 서울에서 인민공화국을 만든 여운형과 선을 대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미군정과의 연계가능성도 있고요.
어쨌든 당시만해도 분단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소군정과의 협력은 일시적이라고 판단한거죠.』
결국 해방초기 조만식과 소군정 사이에는 함께 일할 수 있는 여건은 성립된 셈이었다.
고당이 레베데프를 만나기전까지 북한정치상황의 핵심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수립이었다.
고당은 해방 이틀뒤인 17일 민족주의자 18명,공산주의자 2명으로 「조선건국준비 평남위원회(약칭 평남건준)를 구성했다.
이것이 소 군정의 요구에 따라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각각 16명씩 참여하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27일 개편된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계열이 추천한 김광진이 실제로는 공산주의자로 판명돼 사실상 전세가 역전된 꼴이 됐다.
고당을 위시한 건준측이 소군정의 이같은 요구를 받아들인 배경이나 의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다만 고당의 비서로 일했던 오영진씨(평남건준부위원장 오윤선 장로의 아들·작고)가 그의 저서 『하나의 증언』에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합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중 하나는 소련권력하에 있으면서 공산당을 보이콧해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하나 중요한 이유는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 어느정도 사회주의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건준 스스로가 느꼈기 때문이다.
또 그때까지는 「볼셰비키즘」과 사회주의의 차이를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력하라」고 지시받은 공산당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고 경계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소 군정은 특히 일본이 갖고 있던 도행정권을 이양받는데 있어 인민위같은 조선인자치단체가 직접 받도록 조치했다.
○소군 약탈에 환멸
이같은 조치는 물론 대내외적인 명분축적의 일환이었으나 고당의 입장에서 보면 바람직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소군정은 도에 이어 9월말까지 군단위로 「인민위원회」라는 명칭으로 행정기구를 설치했다.
10월로 들어서자 고당과 소군정은 북한전역을 관장하는 행정기구를 구성하기 위한 협의에 들어갔다.
10월8∼9일 평양에서 열린 이북5도 대표자협의회가 바로 그것이다.
전북한노동당 간부 서용규씨의 증언­.
『5도대표자협의회는 소련군사령부가 소집한 것이 아니라 조만식이 주동이 돼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소집한 것입니다.
여기서 약 한달뒤에 만들어지는 5도행정국을 위한 연락기구로 「5도인민위원회협의회」가 조직됩니다.
물론 소군정과 협의해 결정한 것이고 위원장은 조만식이었습니다.
이런 점을 볼때 조만식과 소군정관계는 원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당이 위원장이던 5도인민위원회협의회는 그뒤 11월19일 5도행정국으로 확대,발족된다.
이로써 고당과 소군정은 북한을 통치하는 행정기구 정비를 끝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당과 소군정사이에는 갈등이 하나하나씩 쌓여가기 시작했다.
고당이 소련군과 국내공산주의자들의 실상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씨의 증언­.
『조만식이 소군정과 마찰을 빚은 것은 무엇보다도 소련군의 약탈행위 때문이었지요.
특히 문제가 됐던 것은 9월에 벌어진 평양고무공장의 기계탈취사건과 10월에 있은 수풍발전소의 발전기를 뜯어간 사건이었습니다.
수풍발전소에서는 한 조선인 기술자가 발전기를 못뜯게 막다가 총까지 맞은 일이 있습니다.
서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9월말에 불붙기 시작한 소작료문제도 갈등요인이었습니다.
고당은 당시 대세였던 지주 3,소작인 7의 3:7제가 지주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해 4:6제를 주장했죠.
그러나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2:8제를 주장해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고당은 그러자 「너희들 마음대로 하려면 해보아라」며 이틀동안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 참석치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같은 갈등속에서도 고당은 소군정의 요청등에 따라 정당을 만들었다.
조선민주당 창당을 둘러싸고 조만식과 소군정,조만식과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접촉을 벌이게된다.
□특별취재반
▲김국후 북한부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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