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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나라를 병기창으로 변모시켜 … 미군은 그 전략적 가치 때문에 철수 안해”
오원철(87·사진) 전 청와대 경제2수석은 한국 방위산업·중화학공업 시대의 설계자다. 그는 총포·미사일을 국산화해 시장경제로 편입시켰다. 오 수석은 병기는 미국에서 얻어와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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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7·4성명 큰 의미 안 둬 … 유신 밀어붙여
“내가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첫마디를 꺼냈다. 국가안보에 관한 중대발표가 있을 거란 예고를 받고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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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해 목숨 바친 선인들을 기억해야" 박정희, 비 새는 현충사 사적 지정 성역화
1962년 4월 28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현충사 사당에서 탄신 417주년을 맞는 이순신 장군 영정 앞에 참배하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충남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는 충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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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이후락 퇴진을” 이만섭 의원 폭탄 발언 공화당 의총 발칵 뒤집혀
3선개헌 길목의 최대 고비는 1969년 7월 29일 있었던 민주공화당 ‘18시간 의원총회’였다. 오전 10시, 서울 장충동 영빈관으로 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모여들었다. 야인(野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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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계, 권오병 해임안 가결 … ‘개헌 반대’ 과시…격노한 박 대통령 “전부 색출해 제명하라”
권오병1969년 4월 초 신민당이 권오병 문교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제출했다. 이유는 문교행정 난맥상과 권 장관의 국회 모독. 그해 2월 열린 국회 사학(私學) 특감장에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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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르, 34세 중령 때 무혈 쿠데타 … JP와 닮아
이집트 혁명 이듬해인 1953년 나기브 대통령(가운데)과 나세르 내무장관(왼쪽). [중앙포토]김종필(JP) 전 총리는 5·16을 준비하면서 이집트와 터키 혁명을 참고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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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1000호 민족기록화 그리자” 화단에 제안 … 일본서 3t 트럭 분량 미술재료 들여와 풀어
1972년 10월 김종필 국무총리(왼쪽)가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과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22회 국전(國展) 전시장을 찾았다. [중앙포토]김종필(JP) 전 총리는 한국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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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난 부자 아니다” … 씨티은행 “재산 2000만 달러”
1977년 6월 22일 미국 워싱턴 의회의 하원(下院) 레이번 빌딩. 경호원 2명의 호위를 받은 회색 양복 차림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청문회장에 입장했다. 프레이저위원회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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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중정부장 김형욱 증언, 왜 신빙성 떨어지나
김종필(JP) 전 총리는 『김형욱 회고록』(1987년 김경재씨에 의해 출간·사진)이 엉터리투성이라고 지적했다. JP의 증언은 김형욱이 주장했던 숱한 얘기들의 근거를 무너뜨린다.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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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박정희를 독재자로 비난했지만 근대화 업적 이룬 ‘위대한 인물’ 로도 표현”
김경재『김형욱 회고록』은 박정희 대통령과 그 정권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한 냉정한 기록인 것처럼 포장돼 왔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부터 84년까지 미국 뉴욕의 한인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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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민영 전 장관, 경북출신 정치인 끌어들여 … 하나회 군맥과 합쳐져 … 80년대 최전성기
엄민영(左), 신현확(右)대구·경북을 일컫는 TK는 지역을 넘어서 특정 정치세력을 지칭한다. TK세력은 1963년 민정이양과 함께 탄생해 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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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박정희와 대야에 발 담그고 함께 술 마셔
“국회의원은 뭐냐. 백수건달 아니면 할 일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오.” 1958년 8월 국회 예결위에서 자유당 초선 의원이 발언권을 청하더니 굵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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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맹군 남하…게릴라 3000명은 사이공 침투…자유 우방들, 월남 시급히 구출해야 할 상황”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1962년 2월 박정희 최고 회의 의장에게 보고한 동남아 정세 보고서. 김종필(JP) 중앙정보부장은 월남을 비롯한 동남아 6개국(일본·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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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첫 도착 4월 22일은 파라과이 기념일 … 2세들 국회의원 등 사회 지도층 진출 늘어”
지난해 8월 파라과이 에서 열린 ‘한국인의 날’ 행사. 한글학교 학생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올해는 파라과이 한인 이민 50주년이 되는 해다. 1965년 4월 3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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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인력 1년 송금액 한때 GDP 4% … 지금 삼성전자와 맞먹는 경제효과”
영화 ‘국제시장’의 윤제균(46·사진) 감독은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경제학 전공자다운 관찰과 취재, 분석이 영화의 현실감·공감도를 높였다. 1400만 관객을 동원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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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 사건 후 권력의지 살아난 박정희…대장으로 전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닦는 박정희 의장. 왼쪽 뒤편은 박종규 경호대장. [중앙포토]민주공화당 창당 이튿날인 1963년 2월 27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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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한전 주식 4만 주 풀며 증시 혼란 … 강성원 전 의원 “약 20억원 갖다 썼다”
‘4대 의혹 사건’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진상 발표를 보도한 1963년 3월 6일자 경향신문 1면.증권파동의 조짐은 1962년 초 감지됐다. 1월 7일 동아일보가 2면 톱기사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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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군인당 냄새 별로 안 풍겨”
1963년 1월 18일 공화당 발기인 선언대회에서 선언문을 읽는 JP.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민주공화당 발기 선언대회가 열린 18일 오전 소공동 조선호텔은 잔칫집처럼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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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자유당 정권 왜 망했다고 보나” 예춘호 4시간 면접
“앞으로 군사정부가 큰일을 하는 데 관계해 달라.” 1962년 초 부산에서 대학강사로 일하던 예춘호는 박규상 동아대 교수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다.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에 동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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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민소득 60 → 120달러 꿈 아니다 … 경제 5개년 계획에 담긴 의욕 무시 말라”
1962년 10월 28일 JP가 월트 로스토 의장에게 민정 이양 계획을 설명하면서 손수 그린 도표. 왼쪽 아래에 JP의 서명이 있다. [중앙포토]“내가 미국에 온 것은 돈을 구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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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김 - 오히라 메모’… 진본 찾아야
오히라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신화’라는 말은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통찰이다. 1961년부터 65년까지 김종필(JP·63년 말부터는 공화당 의장) 중앙정보부장이 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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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세대와 정치인 JP…“운동권과 논쟁한 혁명 2인자 … 근대화 열정 보였다”
이영일(左), 서진영(右)1963년 10월에서 64년 6월까지 JP는 ‘캠퍼스의 정치인’이었다. 63년 10월 22일은 이른바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났던 1차 외유를 끝내고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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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권만큼 난제였던 어업협상, 막판에 타결
이동원(左), 김동조(右)‘김-오히라 메모’(1962년 11월 12일)로 대일 청구권(請求權) 문제를 해소한 한·일회담은 7차 회담(64년 12월 3일 개시)에서 마무리된다. 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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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공개 ‘김-오히라 메모’는 엉터리”
김종필(JP) 전 총리의 증언은 상식으로 자리 잡은 일반의 통념을 부순다. 한·일 회담 50년의 기억은 새로 교정되어야 한다. 2005년 외교부는 3만5000쪽 분량의 방대한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