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문학상 후보작] 허만하 '비어 있는 자리는…' 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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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하씨의 시적 성취는 절차탁마, 와신상담, 노익장과 같은 고사성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70의 나이를 목전에 둔 재작년 10월에 펴낸 그의 두번째 시집, 그것도 30여 년 만에 선보인 그 시집은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는 제목에 걸맞게 단호한 의지와 치열한 열정으로 직조된 상상력의 진경을 펼쳐 보였다.

그의 시세계는 삶의 본질을 꿰뚫는 직관과 사유의 힘으로 마련된다.

"하늘의 높이에서 매는/내가 본 적이 없는 먼 풍경을/보고 있다" ( '하늘' ) 고 선언할 때, 그 '매' 의 시선이야말로 삶의 본질을 거머잡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번 미당문학상 후보작으로 추천된 '비어 있는 자리는 눈부시다' ( '세계의 문학' 2000년 겨울호) 또한 그러한 '매' 의 깊은 시선을 절실하게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 시선은 먼저 어느 폐가의 풍경 속에서 "비어 있는 방안에 서리어 있던 겨울바다" 의 모습과 "태어나면 사라져야 하는 필연의 바람이 들락거리는 문짝 떨어진 빈 방" 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 모습은 적막하기도 하고 쓸쓸하거나 허무하기도 하다. 심지어는 죽음의 자취도 어른거린다.

빈방의 모습 속에서 하필이면 겨울바다의 썰렁한 분위기나 사라져버리는 바람의 흔적을 찾아내는 시선은 모두 삶의 빈자리가 간직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시인은 삶의 빈자리가 얼핏보면 폐가처럼 적막하거나 쓸쓸하고 죽음의 자취마저 느끼게 만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간직하고 있음을 간파해낸다.

그 시선이야말로 "본 적이 없는 먼 풍경을/보고 있는" '매' 의 날카로운 시선이다. 그 날카로운 시선은 늘 빈틈이 없는 삶의 자리만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삶의 자세를 비판한다.

"정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틈새 없는 견고한 촉감에 길들여져 있다" 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이다.

정신의 빈틈을 견뎌내지 못하고 몸의 "견고한 촉감" 을 충족시켜주는 욕망의 대상에만 탐닉할 때 사람들은 "몸 안에 묻혀 있는 비어 있는 눈부신 구석을 보지 못한다" .

그러므로 시인은 비어 있는 채로 삶의 넓고 깊은 가치를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하나하나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가장 절실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도 그것들 속에 있다.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 찰옥수수 쭉정이가 문진처럼 무거운 것은 정연하게 줄지어 있는 비어 있는 금빛 알맹이 흔적 때문이" 라고 시인은 말한다.

버려진 옥수수가 무겁다니 무슨 뜻인??그 무거움은 깨달음의 무게이다.

버려진 옥수수에는 알맹이를 파먹은 흔적이 가지런히 남아있다. 알맹이가 비어 있는 자리, 그것이 우리에게 삶의 무거운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 빈자리는 그곳에 존재했던 삶의 절실한 흔적이며, 허무와 죽음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삶의 자세, 또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깊은 진실을 인정하는 삶의 자세이므로 가벼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 자리를 "중세의 수도승이 기거했던 마리아 라크 수도원의 빈 방" 에 비유하기도 하고 "시가 배경으로 거느리는 침묵의 겨울 숲" 에 비유하기도 한다.

삶의 본질을 꿰뚫는 시인의 시선은 침묵의 공간에 자리잡은 죽음의 세계까지 삶의 빈자리에 초대하여 삶의 자리를 넓히면서 삶을 규명하려는 가열한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다.

그 가열한 의지로 어느 시인보다도 젊은,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어느 시인보다도 깊은 삶의 자리를 거머쥐는 그의 시세계가 나를 전율시킨다.

이경호 <문학평론가>

◇ 허만하 약력

▶1932년 대구 출생
▶57년 '문학예술' 통해 등단
▶시집 『해조』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등
▶한국시인협회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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