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는 독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어떤 잡지는 독재자 같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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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집에 사는 부인과도 옷방만큼은 ‘각방을 쓴다’는 남자, ‘액세서리용 옷방’과 ‘옷 보관용 옷방’이 따로 있다는 여자를 만났다. 그 남자의 이름은 프랑수아 코루치(48), 여자는 발레리아 로피즈(40)다. 코루치는 프랑스의 출판그룹 라가르데의 국제 담당 부회장, 로피즈는 라가르데가 발행하는 세계적인 여성 잡지 ‘엘르’의 국제 담당 디렉터다.

두 사람은 ‘한국 최초의 해외 라이선스 패션 잡지’인 엘르 한국판 창간 2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지난 6일 강남구 신사동 ‘허스트중앙’ 사옥에서 이들을 만났다. 허스트중앙은 국내 최대 미디어그룹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JMNet) 산하 제이콘텐트리 엠앤비 부문에 속한 회사다. ‘한 패션’ 하는 두 사람의 패션 이야기를 들었다.

프랑수아 코루치 부회장(왼쪽)과 발레리아 로피즈 디렉터가 서울 광장동 악스 코리아에서 열린 ‘엘르 한국판 창간 20주년 기념’ 파티에참석했다. 엘르 한국판이 20년간 발행한 240권의 잡지 표지가 배경이 됐다. [사진 허스트중앙]

코루치는 “넥타이 30여 개, 셔츠 50여 벌에 양복은 30벌, 구두는 20켤레쯤 갖고 있다”고 했다. 특히 구두는 “스웨이드·소가죽·양가죽 등 소재별로, 갈색·검정 등 색깔별로 구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영 컨설턴트로 시작해 미디어그룹 라가르데의 경영 부문에서만 일해 왔기에 “패션 잡지 편집장처럼 화려할 필요는 없어서…”라며 멋쩍어했다. ‘굉장히 많을 것이라 추측했겠지만 별로 많지 않다’는 뜻인 듯했다. 편차야 있겠지만 보통 이 나이대 경영자급 남성보다는 많아 보인다. 그런데도 그는 “평범하게 입고 평범하게 산다”고 말했다.

“엘르처럼 43개국에서 출판되는 잡지에서 일하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서로의 문화에 대해서 관대하죠. 옷차림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게다가 전 외부 인사들보다 내부 직원들과 일하는 경우가 더 많아 의상 자체에 힘줄 일이 그렇게 많진 않습니다.”

옆에 있던 로피즈는 “스타일리스트를 꿈꿨지만 사업가인 아버지가 ‘경영학을 하라’고 강권해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고 했다. 소년처럼 짧게 자른 머리, 화장은 민낯에 가까웠다. 무심한 듯 세련되게 멋을 내는 전형적인 ‘파리지엔’ 패셔니스타였다.

“카를(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를 로피즈는 이렇게 불렀다)은 소녀 시절 내게 신(神)과 같은 존재였어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늘 패션 세계에 관심이 많았죠.”

 “스무 살에 당대 패션 디자이너 에마누엘 웅가로의 옆방에서 회계 업무를 하며 패션계에 발을 들였다”는 로피즈의 얘기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여덟 살, 열두 살짜리 두 아들과 함께 사는 로피즈는 “옷만 있는 옷방과, 가방과 구두·액세서리만 보관하는 옷방이 따로 있다”고 했다. 이 말을 할 땐 ‘부럽지?’라는 장난 섞인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구두는 40개 정도 되고 가방은 몇 개인지 잘 모르겠어요. 옷 방 두 개가 그리 크진 않아요. 그래서 한 번씩 입을 것만 두고 나머진 부모님 댁에 보내죠.”

그는 “외할머니, 어머니 모두 부유하진 않았지만 예쁜 것, 좋은 것을 잘 골라 사는 분들”이라며 “요즘은 부모님 댁에 가서 돌아가신 할머니가 어머니께 물려준 옷이나 가방, 액세서리 중 맘에 드는 게 있으면 들고 온다”고 했다. 프랑스를 제외한 전 세계 42개국의 ‘엘르’ 를 관리하며 온갖 유행의 흐름을 꿰고 있는 여성인 로피즈의 멋내기 비법은 ‘빈티지 패션’이었다. “어려울 건 없어요. 내게 편하고 예쁜 걸 골라내면 되는 것이지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 아녜요.”

로피즈는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편하게 입는 게 패션의 정석”이라며 “이는 전 세계에 진출한 엘르의 지향점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은 요즘 패션 잡지 영역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어떤 잡지는 ‘독재자’처럼 군다”는 것이다. 코루치와 로피즈는 “엘르는 그들처럼 독자를 가르치려 하거나 일방적으로 유행 방향을 몰고 가려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특별히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이름을 들춰 비난하려는 건 아닙니다. 독자들은 친구 같은 잡지를 원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 하는 얘기입니다. 독자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다 알거든요. 다만 어떤 옷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알고 싶은 것뿐이에요. 친구처럼 ‘이거 어때?’하며 보여주길 원하는 거죠. ‘이걸 입어라’ ‘이게 유행이다’라고 선언하는 걸 듣고 싶어하는 건 아닌 거죠.”

엘르는 1945년 프랑스에서 첫선을 보였다. 창간인 라자레프 여사가 ‘독자에게 친숙한 얘기, 독자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색다른 것, 특히 패션에 관한 뉴스를 전한다’는 것을 기치로 내걸고 주간지로 시작했다. 프랑스에선 여전히 주간 ‘여성 잡지’로 분류된다. 패션뿐만 아니라 여성과 관련된 시사 이슈 등도 폭넓게 다루기 때문이다. 프랑스 밖 42개국에선 ‘패션 잡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의 거대 출판회사인 콘데나스트가 발행하는 패션잡지 ‘보그’와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는 잡지가 ‘엘르’다. ‘세계 패션의 심장’이라 불리는 프랑스 파리, ‘세계 패션의 수도’라 여겨지는 미국 뉴욕처럼 ‘엘르’와 ‘보그’ 두 매체는 패션 잡지 세계를 양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엘르라는 잡지가 다른 패션 잡지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라자레프의 창간 정신’을 거듭 강조했다.

“1988년 고인이 된 라자레프 여사는 ‘패션이 어렵지 않다’는 걸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잡지를 창간했어요. ‘왜 유행하는지’ ‘무엇이 유행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여성들에게 정보를 주길 원했죠.”

 한국판 엘르가 한국 독자들에게 첫선을 보인 것은 1992년 11월 호. 지난 5일 20주년 기념 파티가 성대하게 열렸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악스 코리아에서 열린 축하연엔 각계 인사 1000여 명이 모였다. 이 파티에 흠뻑 빠졌었다는 두 사람은 “현재 엘르 한국판이 아시아 패션 잡지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전 세계 43개국에서 같은 제호로 발행되는 잡지는 엘르가 유일합니다. 이 시장의 진정한 리더라고 할 수 있죠. 아무튼 43개 버전이 있으니 생산하는 콘텐트의 양도 엄청납니다. 같은 제호를 쓰니 훌륭한 콘텐트가 있는 다른 나라 ‘엘르’에 실린 기사를 사서 자국판에 다시 싣는 경우도 꽤 있어요.”

로피즈는 현재 아시아에선 한국판이 다른 나라판 엘르에 가장 많이 팔리고 있다고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한국판의 높은 수준은 증명됩니다. 물론 주관적으로 봐도 화보 등 콘텐트의 예술적 완성도가 훌륭하고요.”

코루치 부회장은 “최근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미국 등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모든 것에서 앞서 있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며 “한국판 콘텐트에 대한 선호 현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로피즈는 “아시아 이외 나라의 엘르 가운데서는 엘르 영국판이 한국판과 가장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영국판과 한국판의 공통점은 독자층이 젊고, 세련된 패션 화보가 많다는 것”이라며 “책이 두껍다는 외형상의 공통점도 있다”고 했다. 한국판 엘르는 보통 500쪽을 발행한다. 많은 경우 700쪽까지 낸 적도 있다. “콘텐트가 훌륭하고 독자에게 지지를 많이 받으니 광고도 많아 책이 두껍고, 책이 두껍다는 것은 그만큼 ‘잘나간다’는 또 다른 표시 아니겠어요.”

 이들은 “올해 4월 호부터 엘르 한국판은 한국 최고 미디어그룹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와 손을 잡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며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최대 미디어 그룹 간 시너지 효과가 발휘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엘르 한국판은 2009년 미디어 인덱스 조사에서 ‘책을 읽은 누적 독자 수’ 41만7000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판 엘르에 따르면 조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높은 수치이며 지금까지 어떤 잡지도 달성한 적 없는 열독률이다.

 “엘르는 프랑스를 포함해 43개국에서 발행합니다. 물론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별로 상황이 모두 다르니까요. 근데 이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어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묘사된 패션 잡지사 분위기 기억하시죠?(※이 영화의 주 무대는 미국판 ‘보그’로 알려져 있다) 미국판 잡지 편집장과 프랑스판 잡지 편집장이 서로 밀어내려고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는 장면 말이에요. 엘르에선 그런 일은 없습니다. 1년에 한 번씩 전 세계 편집장들이 모이는데 모두 친구처럼, 하나의 ‘엘르 커뮤니티’를 이루어 친하게 지냅니다. 경쟁 관계가 아니라 친구 관계란 거죠.” 두 사람은, 친구에게 속삭이듯 편안하게 패션을 얘기하는 잡지가 ‘엘르’라는 말을 인터뷰 내내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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