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화랑이 백제 소년을 만났을 때

중앙일보

입력

"야, 수리울 작은 바보 달해야!"

동네에서 힘깨나 쓸 것 같은 패거리 다섯 명이 한 소년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고, 패거리들은 낄낄 웃어가며 소년이 메고 있던 지게를 빼앗았습니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패거리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들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은 땅바닥에 꼬꾸라지고 말았고, 마음 속에서 불덩이가 울컥 치밀었지요. 바로 그 때였습니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어서 이 아이한테 지게를 돌려 주어라."
이제 막 스물이나 되었을까요. 늠름한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은 달해를 일으켜 세워 주고는 패거리들과 맞섰지요. 그 때 달해는 보았습니다. 히죽거리던 패거리들이 이리저리 나가 떨어지는 모습을.

그리고 또 보았습니다. 햇살에 빛나는 청년의 맑은 얼굴. 그건 달해가 그 동안 애타게 기다려웠던 세상을 구해줄 장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달해는 몰랐습니다. 지금 백제 땅에 들어와 우뚝 서 있는 청년.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당당한 저 청년은 소년의 아버지를 죽게 한 적군의 나라, 바로 신라의 화랑이었다는 사실을.

애틋한 인연의 끈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이야기
장편 동화 「화랑 바도루의 모험」은 머나먼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바도루는 신라의 용감한 화랑입니다. 화랑이 어떤 사람들이던가요. 명예와 의리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전쟁에 나가면 절대로 물러서는 법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던가요. 지금 바도루는 은밀한 임무를 띠고 백제 땅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인연이란 얼마나 기이한 것인지 바도루는 달해를 구해주고, 또 얼마 뒤에는 달해 덕분에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신라 청년과 백제 소년의 인연. 이 동화는 이처럼 애틋한 인연의 끈을 붙들고 장대한 이야기를 펼쳐 놓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바도루와 달해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지요.

'그래, 다 이 아이 때문이다. 이 아이를 만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고,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거다.'
지금, 바도루는 어느 벌판에 쓰러져 있습니다. 온몸을 두들겨 맞고 눈까지 다쳐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비참한 나락에 떨어진 신라의 화랑. 일이 이렇게 엉망으로 무너진 것은 백제 소년 달해를 만난 뒤부터였지요. 바도루는 스스로의 처지를 참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참을 수 없는 건 그림자처럼 자기를 따르는 달해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절망에 숨이 막힌 바도루가 스스로 목숨을 거두려 했을 때 달해는 바람 같이 달려들어 막았습니다. 바도루는 잠시 정신이 흐릿해졌고 달해의 뺨을 거듭 후려치며 폭풍 같은 노여움을 토해냈지요.

그런 것이었을까요. 오랜 세월 동안 적으로 지내온 백제와 신라. 그 두 나라 사이의 원한이 이렇게 터지는 걸까요. 청년 화랑 바도루는 백제 소년 달해를 잠시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에 뜨거운 눈물로 용서를 빌게 되지요.

그리고 바도루는 조금씩 배웠습니다. 이 세상에 무작정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싸움도, 전쟁도 이 지긋지긋한 미움의 세월을 끝내고 모두가 잘 사는 시간을 만들어내기 위함인 것을. 바도루는 달해와의 만남을 통해 마음의 키가 산처럼 높고, 용기와 충절이 바다처럼 넓은 진정한 화랑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참된 용기를 가르쳐 주는 동화
이 동화를 읽는 어린이들은 아주 오래 전의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납니다. 분명히 하나의 민족이었지만 여러 나라로 나뉘어 싸워야 했던 삼국 시대. 그 역사의 한 가운데에 바도루와 달해가 서 있습니다.

둘은 서로의 맑은 마음을 주고받으며 어려운 시절을 헤쳐나갑니다. 때로는 뜨거운 눈물을 땅바닥에 쏟아야 했고, 때로는 서로의 목숨을 걱정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끝내 두 무릎 꿇지 않은 채 견디고, 살아냈던 것은 바로 이런 깨달음 때문이 아니었는지요. 진정 소중한 것은 늘 가까이 있다는 진실.

그리고 진정한 용기란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 바도루가 토해내는 애끓는 독백을 읽으며 우리 어린이들은 보다 넓은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요.

"내가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너희들이 있었고, 나를 사랑하는 너희들이 나와 함께 있었던 우리들의 봄 들판. 그 곳이 바로 내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그 아름다운 나라를 눈앞에 두고도 먼 지평선 저 편을 바라보며 갈 수 없는 그 나라를 그리워하고 꿈꾸었다니, 나는 얼마나 바보였던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 (최덕수/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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