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앞에 다시 돌아온 내면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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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느린 신부님의 음성이 남편의 목소리를 통해 내게 번역되어 들려왔다. 길지도 않았고, 거창하지도 않았고, 뭐 별다른 메시지도 없었다. 그런데 그 느릿느릿한 말투가, 나그네라는 단어가 나를 이상한 평화 속으로 안내했다. 말하자면 어떤 산사의 사랑방에서 노스님의 느릿한 설법을 듣고 있는 듯한 편안함 속으로 나를 이끈 것이다. "

소설가 공지영씨가 유럽의 수도원 10여 군데를 순례하며 펴낸 『수도원 기행』은 작가 자신의 내밀한 고백이다.

수도원은 세속과는 담을 쌓고 모든 이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자급자족을 위해 일하는 생활 공동체. 때문에 세속의 욕망과 시간, 현실과 역사가 잠든 곳이다.

1980년대 군부독재 시대는 많은 젊음들이 그랬듯 공씨도 열정과 순수를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는 데 던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등 페미니즘과 현실주의적 메시지의 소설을 펴내며 숨가쁘게 달려왔다. 그런 공씨가 불혹(不惑) 의 40 고개를 바라보며 수도원을 찾아 느림과 나그네와 평화를 말하고 있다.

억압받는 현실에서 남을 구제하기 위해 헌신했던 한 젊음이 이제 신 앞에 나그네로 돌아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다시 일어날 때마다 상처 자국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쓰면서, 그 위에 다시 가면을 쓰면서, 그리하여 나조차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져버렸다. 그렇게 떠돌다가 나는 엎어져버린 것이었다. 내가 졌습니다! 항복합니다! 항복… 합니다, 주님. "

무엇 때문에 공씨는 자신의 젊음이 졌다며 울먹이며 항복하고 있는 것인가. "시국토론에 열을 올리던 친구들이 마누라 몰래 다른 여자와 잔 이야기를 하고 아파트 값을 이야기하고 주식 때문에 손해본 이야기" 를 하는, 자신을 포함한 소위 386세대의 위선과 가식에 대한 반성 때문인가.

"상대방이 잘 된들 내게는 아무런 대가가 없는 인연에도 지극히 마음을 쏟아주는, 그래도 당신들에게는 아무런 보탬도 뺄 것도 없어서 결국은 보탬이 되고야 마는 그런" 보상 없는 순수.사랑의 신 앞에 뉘우치고 있다.

"세상에 있는 가지가지 꽃들이 모두 제각기 아름답듯이 나는 뜻밖에도 그런 다채로운 화엄세계의 한 모퉁이를 엿보는 영광을 얻었다" 고 공씨는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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