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의 책과 세상] 고전 번역사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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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올이 제기한 번역의 문제=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의 스타일과 행각, 그리고 학문적 성취는 끊임없이 사회적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얼마전 KBS-TV 『논어』 강의를 임의로 끝낸 돌발행위를 두고 극적 효과를 노린 소영웅주의 행태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게다.

학문적 성과의 측면도 그렇다. 그가 단순한 부흥목사인가, 학문적 온축을 인정할 만한 신학자인가 하는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하지만 누구라도 인정하는 그의 최대공적은 별도로 있다. 1980년대 초반 귀국 직후 그가 발표했던 논문 두 개다.

'우리는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번역에 있어서의 시간과 공간' .

그의 첫 단행본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에 실려있는 두 논문은 번역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뤘다.

도올의 말대로 번역은 우리 학계의 '빈 칸' 이다. 대부분 학자들은 창조적 논문을 쓴답시고 얼럭덜럭 짜깁기하는 작업 대신 정작 공들인 번역은 뒷전이다.

도올의 오래전 지적대로 학문적 축적과정 없이 항상 새롭게 원전에서 다시 시작하는, 그래서 '혼자 읽고 마는' 것이 논문 쓰기다.

번역물을 학문적 성취로 인정하자는 도올의 주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2 동주(東洲) 가 제기한 공모과제=해방 이후 국내 학자중 가장 시야가 넓었던 이는 동주(東洲) 이용희 선생이다. 국제정치학과 미술사 두 분야에서 동시에 밝았다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는 요즘 학자들과 너무 달랐다. 이를테면 그는 조선시대의 사대주의를 두고 요즘의 근대적 민족국가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자는 제안을 했다. 그의 제자인 노재봉 전 총리와 나눈 대담집 『민족주의론』에 실려있는 제안이다. 즉 사대관계란 근대 이전 동북아 외교관계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시야가 넓었던 그의 최대 역량은 그러나 학술행정가 측면이다. 대우재단 이사장으로 근무했던 시절의 그는 공모과제 방식의 지원사업을 국내에서 첫번째로 펼친 당사자다.

구멍이 뚫린 학문영역이나 번역안된 서양고전을 넓은 시야로 발견해 이를 학계에 연구 내지 번역할 사람을 공모하고, 신청을 받아 정교한 심사과정을 통해 지원을 결정했다. 지금 학술진흥재단의 무원칙 내지 산술적 지원방식과는 판이했다.

#3 위기에 놓인 동양학 고전 번역=요즘 동양학계가 뒤숭숭하다. 특히 동양고전 국역(國譯) 부문이 문제다. 내년 예산을 짜는 과정에서 교육부가 올린 동양고전 국역사업 국고보조비 1억5천만원이 기획예산처에 의해 전액 삭감될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만일 삭감이 기정사실화 한다면 올해 첫 집행(1억원) 돼 막 시작된 번역 일감은 손을 놓아야 할 형편이다.

물론 기획예산처는 고전 국역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문화연구회에서 주관하는 한국 고전에 대한 국고보조는 60억원 선에서 지원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대 이전 한국이 어디 외딴 섬으로 존재했는가?

분명 동북아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면서 지적.정서적 공통분모 속에서 살았다면,『춘추좌씨전』 등 중국 고전의 현대적 번역 작업도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다.

세상이 어수선하다 해도 시대의 중심을 잡는 학술진흥 작업은 의연히 추진돼야 한다.

도올과 동주가 제기했던 번역의 문제와, 학술진흥의 넓은 시야를 기획예산처가 한번 더 음미해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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