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영화 중에서 어떤 작품이 가장 볼만할까? '진주만'과 '툼레이더' 등이 개봉했지만 관객들 반응에 비해 평단에선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이라2'는 나름대로 재미있는 대중영화이긴 하지만 속편이라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여름영화 가운데서 흡족했던 작품은 '슈렉'이었다. 이 애니메이션이 좋았던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이제껏 보았던 디지털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작품이었으니까. 흔히 여느 2D 애니를 뛰어넘은 기술적인 진보 정도로 여겨졌던 디지털 애니 분야에서 '혁명' 같은 작품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 같다. '슈렉'은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성, 그러니까 가상 캐릭터들이 나오는 작품임에도 실사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현실성이란 캐릭터들이 얼마나 현실 속 인물들과 비슷하게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라는 점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슈렉'은 기상천외한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새롭지는 않다. 이미 있는 동화 속 주인공들을 슬쩍 각색하고 변형시키고 있으므로. 대충의 줄거리는 이렇다. 슈렉은 성밖 늪지대에 살고 있는 못생긴 초록색 괴물이다. 진흙 샤워를 즐기고 동화책을 화장실 휴지로 삼으며 살아간다. 어느날 슈렉의 집에 동화 속 주인공들이 쳐들어온다. 영주가 주인공들을 성밖으로 쫒아내면서 갈곳이 없어진 것. 슈렉은 영주와 담판을 짓고 영주 대신 용의 성에 갇혀 있는 피오나 공주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수다쟁이 친구 덩키와 슈렉은 피오나 공주를 성공적으로 구출하지만 예상 밖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슈렉과 공주가 서로 눈이 맞은 것.
잘 알려져 있듯, '슈렉'은 기존의 동화 속 캐릭터들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패로디한다. 그런데 방식이 조금 남다르다. 동화에 나오는 공주가 공중제비를 돌며 발차기를 하고 다니며 못생긴 괴물과 연애를 한다. '슈렉'에선 정말로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제작진은 안면근육 애니메이션 시스템, 그리고 쉐이퍼라는 기술을 응용하면서 웃고 우는 표정을 자유자재로 연기하는 슈렉 등의 캐릭터를 창조했다. 심지어는 실사영화에 사용되는 스테디캠 카메라를 사용해 전투장면이나 용의 성으로부터 탈출하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다. 물론 이같은 점은 '슈렉'이 다른 애니 작품들보다 월등한 기술적 수준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마이크 마이어스, 카메론 디아즈, 에디 머피에 이르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목소리 연기도 재미를 더한다.
'슈렉'을 만든 이들은 드림웍스의 PDI 출신들인 앤드류 아담슨과 비키 젠슨. 이들은 의도적으로 드림웍스와 디즈니의 애니를 차별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디즈니가 어린이 관객들의 취향에 눈높이를 맞추면서 비슷한 종류의 판타지를 반복해서 생산한다면 '슈렉'은 기존의 동화와 판타지를 철저하게 조롱하고 있으므로. '슈렉'은 최근 나왔던 여느 애니메이션 작품들보다 재치있는 대사와 상황들이 많다. 대부분은 '백설공주'에서 '피노키오' 등 우리에게 익숙한 애니의 상황을 코믹하게 비튼 것들이다. 웃음을 유발하면서 의외로 톡 쏘는 맛이 있다.
'슈렉'은 앞서 말했듯 동화 속 캐릭터들이 무척 황당하게 등장한다. 괴물은 너무나 마음씨 착하고 공주는 밤엔 모습이 돌변하여 괴물이 된다. 둘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된다. 이 작품의 재미있는 점이라면 이런 '황당함'이 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점. 다시 말해서 동화 속 캐릭터들이 동화 같은, 꿈같은 사랑을 하는게 아니라 현실의 인간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 거다. '슈렉'에서 공주는 괴물이 못생겼음에도 그를 사모한다. 그리고 괴물 슈렉은 공주가 실은 남들이 볼수 없는 밤시간엔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여전히 사랑한다. 즉 환상적인 동화가 아니라 현실의 인간이 선택하며 나름대로 괴로워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얘기인 것이다. 같은 이유로 '슈렉'은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고지, 그러니까 가장 인간적인 '온기'를 지닌 작품이라 할만하다. 칸영화제가 올해 경쟁부문 출품작으로 선뜻 결정했던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