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25주년] "아들 올까 대문 못 잠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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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금순씨가 17일 광주 5.18 국립묘지 행방불명자 묘역에서 아들의 소지품을 묻은 빈 묘를 바라보고 있다. 아래 사진은 아들의 당시 모습. 양광삼 기자

"지금도 '엄니' 하고 방문을 열고 올 것 같소. 그래서 아직도 대문을 못 잠그고 사요(살아요)."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행방불명된 아들(고재덕.당시 14세)을 25년째 기다리는 손금순(73.광주시 북구 오치동)씨는 17일 광주국립묘지를 찾아 오열했다.

1980년 5월 20일 오전 9시30분쯤 아침밥을 먹자마자 "금남로 일대에서 계엄군과 시민들 간 쫓고 쫓기는 현장을 구경하러 간다"며 집을 나간 아들은 그 뒤 소식이 끊겼다.

손씨는 뜬눈으로 밤을 샌 뒤 다음날 아침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총성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전남도청 주변으로 아들을 찾아다녔다. 계엄군이 사망자들을 청소차량 등으로 실어다 버린 운정동 현 광주시립 3묘역에 가 시신들을 이 잡듯 뒤지기도 했다. 손씨는 "아들의 시신을 찾지 못해 한편으로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충격으로 쓰러진 남편마저 그해 7월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민주화운동이 잠잠해지면서 황룡강을 비롯해 여수 등 광주.전남 곳곳에서 희생자의 시신이 발견될 때마다 손씨는 현장을 찾아다녔다.

현장에서 3~4일씩 밥을 해 먹고 노숙을 하면서 아들 시신만이라도 찾기를 간절하게 소망했으나 매번 허사였다. 그래도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87년 말까지 7년여 동안 아들을 찾아다녔다.

89년 아들이 민주화운동 희생자 중 행방불명자로 인정받자 손씨는 유리관에 아들의 사진과 함께 이름, 생일생시, 집을 나간 날짜를 적어 넣어 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공교롭게도 광주민중항쟁이 터진 날이 아들의 생일(음력 4월 5일)이어서 해마다 5월이면 가슴이 더욱 찢어진다는 손씨는 "지금도 (아들이) 어디엔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젖곤 한다"고 말했다.

손씨는 "아들이 죽었다면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줘야 그날의 상처가 아물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손씨처럼 시신을 찾지 못했으나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인정받은 행불자는 65명. 이들은 광주국립묘지 한쪽 행불자 묘지에 생전의 소지품 등으로 관을 만들어 안장됐다. 실종됐으나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행불자도 40여 명이나 된다.

행불자 가족들은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도록 계엄군들이 사망자를 암매장한 장소 등 광주민중항쟁의 모든 진실이 밝혀지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12월 검찰이 5.18 수사기록 30여만 쪽 가운데 7만여 쪽을 공개했으나 계엄군의 전투상황 일지 등 암매장 장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핵심 기록이 빠져 행불자 가족들의 불만은 더욱 크다.

광주=서형식 기자 <seohs@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yks23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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