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소가죽 구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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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기택(1957~ ), '소가죽 구두'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구두 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 주걱 자국을 천천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는 열린 저곳으로 나가야 한다. 문은 그의 용기를 시험하듯 뻑뻑하고 비애를 동정하듯 축축하다. 그는 나아간다. 입구 또는 출구. 열고 나아가지만 끝내는 허공의 자리. 그래도 허공이 그를 감싼다. 그가 누구인지, 아니, 그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다.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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