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주 쾌거로 들여다본 한국마라톤의 현실

중앙일보

입력

"가능성은 확인했지만 대를 이을 선수가 보이지않는다." 17일 새벽 이봉주의 보스턴 쾌거를 지켜본 한국마라톤의 원로 서윤복(78)옹의눈물 속에는 54년전 우승의 감격과 함께 깊은 시름도 배어 있었다.

이봉주가 시드니올림픽 불운을 딛고 다시 한번 한국마라톤의 저력을 떨쳐 뿌듯했지만 가슴 한켠에서는 당장 이봉주의 대를 이을만한 재목이 없다는 현실이 서옹의어깨를 짓눌렀다.

이봉주의 쾌거는 국민 앞에 국내 마라톤계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드러냈다는점에서 의미가 깊다.

92년 황영조의 바르셀로나올림픽 우승으로 40여년의 암흑기를 벗어난 한국 마라톤은 이봉주의 '96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과 이번 보스턴마라톤 우승을 통해 기초종목 육상에서 마라톤만큼은 경쟁력이 있다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번 보스턴대회는 한국마라톤의 끈질긴 생명력을 확인하는 한편 이봉주 개인적으로도 시드니의 아쉬움을 털고 자존심을 되찾게 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봉주 다음엔 누구'라는 질문에는 육상인들조차 고개를 떨구고 있는게 한국마라톤의 말못할 현실이다.

이봉주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김이용(상무)이 지난달 동아마라톤에서도 부진해 사실상 차세대 주자대열에서 밀려났고 기대주 정남균(삼성전자)은 올림픽에 이어 동아마라톤에서도 10위권 밖으로 밀려 `깜짝스타'라는 지적을 받기에 이르렀다.

두 선수 뒤에는 코오롱 출신인 오성근, 제인모(이상 상무)와 김제경(삼성전자),임진수(코오롱)가 버티고 있지만 `국내용'이란 평가가 내려진지 오래다.

다만 `마라톤 대부' 정봉수(코오롱) 감독이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삼은 지영준(코오롱)의 활약 여부가 변수로 남아있지만 아직 풀코스를 뛰지 않아 검증조차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더구나 이봉주와 김이용의 경우 코오롱에서 성장한 선수란 점에서 한국마라톤은 여전히 정 감독의 그늘에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마라톤의 딱한 현실은 기초종목이 천대받는 국내 스포츠의 기형적 구조에 그 원인이 있다.

프로종목, 특히 축구와 야구가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 꿈나무들에게 접근해 닥치는 대로 입도선매하고 있고 선수들 역시 돈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쉽사리 육상영웅의 꿈을 접고 있다.

아들을 육상선수로 둔 임상규 삼성전자 코치는 "아버지가 육상코치인데도 불구하고 프로종목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유혹하고 있다"며 "메마른 땅에서 새싹이 절대 자라날 수 없듯이 척박한 풍토에서 영웅을 기대하기는 무리"라고 말했다.

결국 마라톤을 비롯한 한국육상에서 제2의 황영조와 이봉주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기초종목 육성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서울=연합뉴스) 김재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