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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가 무서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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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안철수 편 힐링캠프는 별로 재미없었다. 문재인처럼 격파시범을 보이다 손목 인대를 다치지도 않았고, 박근혜처럼 스피드 퀴즈 푸느라 허둥지둥하지도 않았다. 2009년 방송된 무릎팍도사 안철수 편보다도 신선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청률은 문재인·박근혜보다 훨씬 높게 나왔다.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도 재미없다. 오래 전에 나온 안철수 책들은 대개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진솔한 얘기를 풀어 나가는 형식이었기에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는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이번 책은 그냥 선거용 공약집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에 대답하는 좋은 얘기 모음집이다. 그런데도 불과 닷새 만에 15만 권 넘게 팔리는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이렇게 재미없는 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구경꾼 입장에선 그냥 놀라운 정도지만, 정치판에 몸담고 있는 기성 정치인 입장에선 무서울 수밖에 없다. 한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무서움이 손에 잡힐 정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책 한 권 달랑”이라거나 “읽을 게 없는 짜깁기”라는 식으로 안철수를 폄하하는 발언은 초조와 불안의 방증으로 읽힌다. 속으로는 무서우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태연해 해야만 하는….

 안철수가 진짜 무서운 이유를 따져보자. 정당의 최대 악몽은 정권창출의 실패다. 그래서 정치인들 입장에서 안철수가 무서운 진짜 이유는 ‘차기 정권을 빼앗길 가능성’ 때문이다. 이미 심각한 상황이다.

 일단 안철수의 대선 출마는 거의 확실해졌다. 『안철수의 생각』을 보면 사실상 출마선언용 공약집이다. 안 교수가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생각했던 이유는 ‘한나라당에서 다시 시장직을 차지하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이 다시 대통령직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정의롭지 못하기에 이를 막기 위해 나설 필요가 있다. 정치에 실망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안철수의 책임감이며, 그래서 대선 출마는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안철수의 출마는 이런 ‘시대적 소명이자 정의 바로세우기’ 차원이기에 일단 출마하면 자기 맘대로 중도 포기할 수 없다. ‘도전과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안철수는 ‘성공이란 결과를 바라기보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럴 경우 대선은 새누리당 후보와 민주당 후보, 그리고 안철수 3파전이다. 3파전 구도에선 박근혜 후보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된다. 그래서 야권에선 당연히 후보단일화를 지상과제로 여긴다. 지지율이 높은 쪽으로 단일화하자면 안철수가 최종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안철수의 캠페인은 상당한 파괴력을 보일 것이다. 그는 이미 기정 정치판을 ‘앙시앵 레짐(구체제)’으로 몰아붙이는 논쟁의 틀(프레임)을 선보였다. 앙시앵 레짐은 프랑스 혁명으로 청산됐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모두 청산대상이란 불도장이 찍혔다.

 기성 정치인 누구든 이런 낙인에 저항하며 현실정치를 변명하려다간 점점 깊은 수렁에 빠져들 수 있다. 현실은 너저분하고 이상은 달콤하다. 유권자들은 지고지순한 안철수의 ‘정치 때리기’에 열광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정치인 아닌 일반국민들 입장에서 안철수가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다. 안철수 대통령 당선 이후의 불확실성이다. 국민 입장에선 ‘누가 정권을 잡느냐’보다 ‘누가 국정을 잘 운영할까’가 더 중요하다. 안철수가 헌신적인 의료인이며, 성공한 사업가며, 창의적인 교육자인 점은 이미 확인됐다. 그러나 과연 그런 성공이 훌륭한 대통령까지 보장할 수 있을까.

 현재 유력 후보인 박근혜나 문재인이 대통령이 될 경우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는 대충 예상가능하다. 박정희의 딸, 노무현의 분신이란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이라는 정당과 당원들의 보좌를 받을 것이다. 실망스러운 점이 많겠지만 예측가능하다는 점에선 덜 불안하다.

 반면 안철수의 경우 정치와 무관했던 개인적 경험, 그리고 최근 10개월간 학습결과로 정리한 공약집뿐이다. 정치인 안철수를 평가하기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앙시앵 레짐 이후에 대한 청사진이 없다. ‘소통과 합의’만으론 공허하다.

 안철수의 공식출마와 검증을 재촉하는 목소리는 이런 불안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많은 유권자들은 상대적으로 ‘부진한 야권’과 ‘부동의 여권’에 식상해 있다. 그래서 안철수에 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기대와 불안이 섞인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