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노 도산' 위기 몰린 테헤란밸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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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밸리가 흔들리고 있다. 침체된 경기가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자금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혹한의 겨울이 엄습할 것이라는 어두운 예측이 테헤란밸리를 짓누르고 있다.

이는 우선 미국의 신경제를 이끌어온 정보기술(IT) 산업이 최근 실적 악화와 수요 둔화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내 IT 시장 전반이 심각한 침체 국면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또 기업 구조조정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덩달아 금융권 구조조정 작업도 흐지부지돼 자금이 건전한 기업투자로 몰리지 못하는 것도 주요 요인으로 풀이된다.

경기 불황과 이에 따른 어려운 자금시장은 벤처기업의 생존 기반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다. 어려운 자금시장 때문에 투자 자금을 제때 구하지 못한 벤처기업의 ‘도미노’ 도산이 잇따를 것이라는 섬뜩한 시나리오마저 나돌고 있다. 이미 이 같은 시나리오는 테헤란밸리 곳곳에서 현실로 감지된다.

초고속 통신 서비스 업체인 네티존은 최근 법원으로부터 파산 선고를 받았다. 네티존은 지난해 9월 부도 후 화의를 신청했던 벤처기업으로 법원이 화의를 인가하지 않고 직권으로 파산을 결정해 충격을 주었다.

법원은 결정문에서 “네티존은 설립 초기 벤처투자 열기와 맞물려 손쉽게 거액의 자본을 유치하자 시장 분석 없이 과도한 시설 자금을 투입했다”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해지자 가입자 증가율을 높이려 원가에도 못 미치는 덤핑 행위로 저수익·고비용 구조와 자금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법원이 화의신청 기업에 대해 인가 전 직권으로 파산 선고를 내린 것은 최근 대구 벤처기업인 S사에 이어 두번째다.

네티존과 같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소 규모 업체의 어려움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터넷 붐과 맞물려 99년 호황을 누렸던 이들 업체의 대부분은 경기불황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하나 둘 쓰러지고 있다.

실제로 네티존과 비슷한 사업을 추진해 온 마이크로ISP와 나이스넷도 최근 문을 닫았다. 마이크로ISP와 나이스넷은 한국통신이나 하나로통신, 두루넷과 같은 망 사업자로부터 회선을 임대해 이를 다시 저가에 재판매하는 사업을 벌여 왔으나 최근 가입자가 기대치에 크게 못 미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연쇄 도미노 부도 망령은 별다른 수익 모델을 찾지 못하는 인터넷 기업에게 더욱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온라인 석유 거래업체인 페트로마켓은 서비스를 오픈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기업청산 과정을 밟고 있다. 섬유원사 전문 전자상거래 업체를 표방하며 연초 서비스를 시작했던 A사도 국내외 자금유치 실패와 국제 간 섬유 거래 실적 미진으로 최근 사업 아이템을 재검토하는 상황이다.

전자상거래는 물론 관련 솔루션을 개발해 공급해 온 B사 역시 외국계 컨설팅 업체인 G사로 경영권을 넘겨 주었다. 이 업체는 주주총회를 거쳐 그동안 방만하게 운영해 온 이사진을 대부분 교체할 것으로 보여 이 분야에서 손을 뗄 것으로 점쳐진다. 이 밖에 식품, 석유, 전자, 자동차 등 산업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설립되었던 주요 전자상거래 업체가 퇴출이나 인수·합병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할 전망이다.

닷컴업체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사례의 하나가 최근 열풍처럼 번지고 있는 웹사이트 매각 바람이다. 웹사이트 온라인 거래를 중재하는 사이트마켓(www.sitemarket.co.kr)에 따르면 3월 현재까지 매물로 나온 벤처 기업의 웹사이트가 무려 4백여 개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일부 벤처 기업의 경우 자금 확보를 위해 보유하고 있는 우량 웹사이트까지 매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인터넷 벤처기업이 최근 구조조정에 열을 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벤처기업의 이 같은 도산 우려 때문에 그동안 인터넷과 정보통신 벤처기업에 집중되었던 벤처캐피털의 자금 흐름도 이상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 세계 증시에서 첨단 기술주의 주가가 극심한 부침을 반복하고 인터넷 기업의 수익성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됨에 따라 국내 벤처캐피털의 투자가 사업 모델의 여부에 따라 양극화되고 있다.

이처럼 사업 모델에 따라 자금 흐름이 극단적으로 편중될 경우 앞으로 1∼2년 내에 추가 증자에 실패한 벤처기업의 ‘무더기 퇴출’과 이미 거액의 투자를 단행한 벤처캐피털 업체의 연쇄 도산 가능성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이미 신규 벤처투자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국내의 대표적인 벤처캐피털인 K사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30여 개의 IT 벤처 업체에 투자했지만 최근 이들 업체의 투자 프리미엄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며 “벤처기업이라도 투자자를 설득할 만한 비즈니스 모델이 없으면 투자를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금융권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확실한 사업 분야가 있는 벤처 기업이라 하더라도 2∼3개월 전보다 50∼70% 이상 낮게 투자 규모를 잡아 협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벤처캐피털뿐 아니라 주요 은행권도 당초 계획했던 벤처투자를 지속적으로 단행할 계획이지만 수익성과 관련된 인터넷 기업 거품론의 확산으로 불과 3∼4개월 전에 비해 투자에 훨씬 더 신중을 기하고 있는 분위기다.

벤처캐피털들은 새로운 벤처에 투자하기보다는 기존에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는데 더 골몰하고 있다. 벤처캐피털 C사의 한 심사역은 “요즘도 가끔 사업계획서를 들고 오는 벤처기업인들이 있긴 하지만, 별 관심이 안 간다”며 “그보단 투자한 벤처들을 만나 자금 회수 방법을 의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털어놨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초기 벤처기업을 발굴해 투자하기보다는 인수·합병이나 A&D(인수 후 개발)에 더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실정. 코스닥 등록 요건도 엄격해진 상황에서 실력만으로는 코스닥에 진입하기 어려워지자, 어떻게 해서든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투자 수익을 따지느라 계산기를 두드리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늘어가고 있는 투자손실을 계산하느라 바쁜 날을 보내고 있는 게 요즘 벤처캐피털들의 풍경이다.

김병준 전자신문 기자(bjkang@etnews.co.kr)
자료제공 : 이코노미스트 (http://www.econo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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