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세상] 대학로서 열린 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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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갔습니다. 그러잖아도 젊음의 거리에 막 찾아온 봄이 '나 보기에 어떻느냐' 고 묻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봄을, 청춘과 낭만, 청운의 꿈, 눈썹에 어른거리는 햇살처럼 화사한 그리움 모두를 어디에 갖다버렸느냐 묻고 있었습니다.

그 대학로에 있는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21일 저녁 '시제(詩祭)' 가 열렸습니다. 현대시학회(회장 김춘추) 주최로 2백여명의 시인과 문학도들이 모여 말 그대로 시에 대한 고사를 문단 사상 처음으로 올렸습니다.

"시신(詩神)이시여 부디 강림하사 새봄과 함께 푸른 삶의 새싹, 시의 새싹을 돋아나게 하소서. 시와 춤의 제물을 흠향하시고 시의 막힌 길을 열어주소서" 라는 제문봉독에 이어 시낭송과 춤으로 시의 신을 맞이했습니다. 새봄에 올리는 시제에 걸맞게 올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시낭송을 맡았습니다.

"강경상회 이씨는/짠 손바닥에다 새우를 키운다/멸치떼도 몰고 다닌다/헝클어진 비린내를 싣고 와/육거리 젓갈시장 골목 가득 풀어놓는다/날마다 그는 해협을 끌어다/소금에 절여 간간하게 숙성시킨다/그가 퍼주는 액젓은/오래 발효시킨 수평선이다/(중략)/저무는 수평선처럼 강경상회가 셔터를 내리면/골목에다 몸풀었던 바다 갯내음/썰물처럼 빠져나가고/싱거웠던 내 몸, /어느새 짭짤하게 절인/젓갈이 된다"

대전일보에 당선된 이가희씨의 위 시 '젓갈 골목은 나를 발효시킨다' 낭송을 들으며 시신은, 시는 '강경상회 이씨' 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헝클어진 비린내 같은, 혹은 싱거운 우리네 삶을 잘 발효시키고 짭짤한 의미를 돌려주는 것이 시가 아닐까요.

그런데도 요즘 시가 우리들로부터 멀어지고 있고 또 좋은 시들도 안쓰여지고 있어 삶이 날로 비린내 나는 생짜로만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 오죽하면 시인들이 모여 이런 고사라도 지내게 됐을까요.

우리 마음에, 일상에 다시 시신을 맞아들이기 위한 고사인지라 이날 출연한 이애주씨의 춤에 신령한 무슨 기대를 걸었습니다.

이씨가 어떤 춤꾼입니까. 화염병 난무하는 거리에서 춤을 추며 민주화를 불러들였고 민주화를 외치다 죽어간 원혼들을 천도한 시대의 춤꾼 아닙니까. 그래 어떤 몸짓으로 시를 간절히 표현해내며 시신을 맞이할까 긴장된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왠걸, 단군 이전부터 내려왔다는 '영가무도(詠歌舞蹈)' 를 시인들에게 가르치더군요. '음 아 어 이 우' 라는 다섯 소리를 욕탕 속에서 노인네 같이 계속 흥얼거리더군요. 그러다 흥이 나면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 이것이 춤과 노래와 시가 분리되기 이전의 가악무 삼위일체의 춤이라고 합니다.

시국춤에서 승무까지 이 춤 저 춤 다 추다보니, 나는 왜 이런 춤을 추고 있고 이 몸짓의 뿌리는 무엇인가를 찾아가 그 맨 꼭대기에서 이 영가무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 최초의 꾸밈이 없는 이 소리와 춤이야말로 우주만물의 행위와 뜻을 사람이 같이하는 것이라는 말에 이씨가 왜 시제에서 이 춤을 가르쳤는지 시인들은 수긍하더군요.

정치.사회 등 시국에 묶인 '나' 이면서도 원초로 거슬러 올라가 우주와 화통할 수 있는 몸짓을 찾는 것, 그것이 곧 춤의 신이며 시의 신을 맞이하는 것이라는 것을 시인들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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