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에세이] 정병철 모헨즈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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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에는 내 돈이 없어도 사업을 할 수 있다. 내가 개발한 기술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장은 가지고 있는 게 되레 부담스럽다.

시장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자본은 금리가 싼 나라에서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다. 기술도 사오면 된다. 공장은 임금이 가장 싼 나라에 외주를 주면 된다.

결국 고객의 요구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그것을 상품화해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요사이 마케팅 전문기업, 서비스 기업을 표방하는 기업이 하나 둘 늘어나는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개발이라는 외길을 걸어가는 기업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개발했다고 해도, 이제는 시장에서의 성공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기술을 상품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애쓰는 동안, 마케팅과 영업력이 강한 시장지배적 사업자가 유사 기술을 도입하면 그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기술개발에 전념해 오던 회사들이 최근 기술개발보다 기술판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또 그것이 가장 전략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훌륭한 기술을 개발해도 사업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니 적당한 수준에서 시장지배적 사업자에게 그 기술의 상품화를 맡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이라곤 연구개발인력이 대부분인 벤처기업의 입장에서는 기술을 파는 것도 쉽지 않다. 기술을 사고파는 기술시장에 자신을 소개하는 데도 장벽이 있고,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또 있다. 국산 기술에 대한 차별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기술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국내기술'' 일 뿐이라는 냉소를 너무 쉽게 보낸다. 해외에서 들여온 것이라면 우리가 만든 것보다 훨씬 좋을 것이라고 너무 쉽게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적어도 인터넷과 관련된 산업에서 우리는 산업화 시대의 난쟁이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인터넷 사용인구가 많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고, 기술이 쏟아져 나온다. 그중에는 정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가 인터넷 세상의 표준을 만들지는 못한다. 혹시 우리가 만든 기술을 우리가 먼저 써보고 자랑하기는커녕, 남들이 인정해주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처음 써보는 모험을 우리가 회피한다면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모자라는 기술을 억지로 써 달라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 것이라는 이유로 우리 스스로에게 외면당하고 싹이 잘리는 불행한 일이 이제는 없어져야 한다.

정병철 모헨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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