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금리 인하 배경과 향후 전망]

중앙일보

입력

그린스펀은 역시 보수를 택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20일 단기 금리를 인하하면서 당초 예상에 다소 못미치는 0.5% 포인트 카드를 꺼내자 경제전문가들은 앨런 그린스펀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경제의 실체(reality)와 투자 심리(perception) 가운데 실체에 무게를 더 둔 것으로 평가했다.

금융계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잘 나가던 경제에 `빨간 불'이 켜진 상황에서 그린스펀 의장이 어떤 처방을 내놓을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

지난 1월의 두 차례 등 올 들어 석 달도 채 안돼 세 차례나 금리를 내린 것을보면 FRB도 현재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인식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증권시장의 투자 심리가 얼어 붙어 주가가 연일 폭락하자 전체 경제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소비 심리마저 흔들려 경제의 경착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고조되면서 FRB가 0.75%포인트 또는 그 이상의 큰 폭으로 `깜짝 효과(surprise effect)'를 노릴 것으로 폭넓게 점쳐져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0.5% 포인트로 낙착된 것은 투자 심리가 아무리 나빠도 실업률이 4.2%로매우 낮고 실물 경기 판단의 척도인 주택과 자동차 매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금리를 지나치게 많이 내리면 공연히 물가 불안을 재촉할 수 있다는 우려가 그린스펀 의장의 심중에 자리잡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아울러 주가가 폭락했다지만 지난해의 사상 최고 수준에 비해 하락 폭이 20%에도 못미치고 있으므로 아직도 거품이 10-20%는 남아 있다는 분석도 큰 폭의 금리 인하에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국 금융계에서 정확한 분석력을 인정받고 있는 손성원 웰스 파고은행 부행장은 "실체와 심리 가운데 어느 쪽을 보느냐가 FRB의 판단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며 "FRB는 이번 조치로 주가 하락이 계속되면 금리를 또다시 내려야 하는 위험부담을 안게 됐다"고 지적했다.

FRB도 이러한 시각을 의식한 듯 금리 인하 폭을 발표한 뒤 "경제 여건이 급속히발전하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여차하면 4월에 또다시 금리를 조정할 여지를 열어 놓았다.

손 부행장을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FRB가 4월과 5월에 각각 0.5% 포인트씩 추가로 인하, 시중은행간의 하루짜리 초단기 콜거래 자금인 연방기금(FF)의 목표금리를 연 4%까지 낮출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다만 금융계 일각에서는 FRB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우'를 범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한 전문가는 "금리 인하의 적기를 놓친다면 미국도 언젠가는 더 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는 일본과 같은 처지로 전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한편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며 경기부양책으로 대규모 감세를 주창하고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금리 인하 조치를 즉각 환영했던 지난 1월과 달리 이번에는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FRB의 판단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워싱턴=연합뉴스) 이도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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