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 대신 돈 풀어 유로 구하기 … 드라기 ‘ECB 쿠데타’ 나올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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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미국 통화정책 역사에서 ‘10·6 회의’는 하나의 분수령으로 꼽힌다. 폴 볼커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1979년 10월 6일 공개시장정책회의(FOMC)에서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한 달 전 9월 회의에서 볼커가 반대파에 밀려 하지 못했던 선언이었다. 이후 FRB에선 물가안정을 중시하는 패러다임이 주류가 됐다.

 볼커의 한 세대 후배 중앙은행가인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도 ‘10·6 회의’ 같은 분수령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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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오후(한국시간) ECB 금융통화정책회의가 열린다. 얼핏 보면 매달 두 번 열리는 깨알 같은 정책회의 가운데 하나다. 경제 분석가들 대부분이 금리인하 정도의 결정이 나올 것으로 예측했다. 인하 폭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치도 나왔다. 로이터통신 등은 “드라기 총재가 기준금리를 1%에서 0.75%로 0.25%포인트 내릴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다수”라고 전했다. 그러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ECB 본부 안팎에선 ‘기준금리 인하+α’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기준금리 인하 이상의 대책에 대한 기대가 시장에 퍼져 있다”고 3일 전했다. 시장의 기대는 기준금리 소폭 인하나 재정위기국 국채매입 재개 같은 소소한 대책이 아니다. ECB판 양적완화(QE) 등 과감한 정책이다.

 영국 런던의 유럽개혁센터(ERC)의 선임 이코노미스트인 필립 와이트는 최근 블로그에서 “앙겔라 메르켈이 지난달 29일 정상회의에서 남유럽 협공에 밀려 재정긴축 전략을 사실상 포기했다”며 “비슷한 일이 ECB 내부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측했다. ECB에서 최대주주인 독일에 대한 반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세력 분포를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경제·금융 정보 전문인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정책위원 22명 가운데 긴축과 물가안정을 중시하는 쪽은 6명이다. 최대주주인 독일 출신 2명을 가운데 두고 핀란드·네덜란드·룩셈부르크·에스토니아 중앙은행 총재들이 도열한 모습이다. 반면에 성장을 중시하는 비둘기파는 12명이나 된다.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포르투갈 등 남유럽 출신들이 주축이다. 중도파는 드라기 총재 등 모두 4명이다. 수적으로 보면 비둘기파가 압도적 우세다. ECB 의사결정은 다수결 원칙만으론 이뤄지지 않았다. 물가 안정 속에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 분데스방크의 경험과 노하우가 ECB의 정통 교리다. 이런 교리를 충실히 따를 사람만이 독일의 지지를 받아 ECB 총재가 됐다. 이탈리아 출신 드라기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독일의 꼭두각시만은 아니라는 분석이 최근 제기됐다.

 핀란드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인 카리 알호는 유럽 경제정책연구소(CEPR) 웹진에 쓴 글에서 “드라기의 별명은 ‘수퍼 마리오’가 아니라 ‘금융 마키아벨리’가 적절할 것”이라며 “그는 프랑스 대선 이후 정치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드라기가 ECB의 적극적 위기 대응을 주장하는 프랑수아 올랑드가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된 점을 활용해 독일에 반기를 들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그는 조짐을 보였다. 지난달 22일 드라기는 독일의 반대에도 긴급 자금을 시중은행에 빌려줄 때 받는 담보의 요건을 완화했다.

 전문가들은 드라기가 독일의 반대를 물리치고 추진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정책으로 ECB판 양적완화를 꼽는다. 그가 좀 더 과감하게 나간다면 회원국 국채를 시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사들이는 방안도 논의될 수 있다. 실제 이런 정책들이 결정되거나 논의되면 물가안정만을 유일 목표로 삼아온 ECB가 또 다른 실험을 시작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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