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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정보보호협정은 불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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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남윤호
정치부장

일본에겐 외교적 예의쯤 무시하고 거칠게 나가도 된다. 이런 생각 하는 분들, 의외로 많다. 정치 지도자들부터 그렇다. 김영삼 정부 때는 대통령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호언한 적이 있다. 외교적으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김대중 정부 초기엔 다 끝난 어업협상을 다시 하자며 해양수산부 장관이 도쿄로 날아가 구걸에 가까운 ‘쌍끌이 어업협상’을 했다. 이 역시 외교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트러블이 적잖다. 대부분 순수한 외교관계보다는 국내 정치상황이 투영돼 벌어진 일들이다.

 외교는 흔히 내치의 연장(延長)이라 한다. 그중에서도 대일 외교가 유독 내치와의 연관성이 크다. 때론 내치의 소모품이 되기도, 심하면 배설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정치쟁점으로 번진 한·일 정보보호협정도 그렇다. 옳다면 쏟아지는 비난을 뚫고 밀어붙이든지, 욕먹는 게 무서우면 아예 하질 말든지 해야 할 텐데 정부는 어땠나. 쉬쉬 하며 추진하다 서명식 당일 취소하고 말았다. 하필 제2 연평해전 10주년 기념일에 안보와 관련한 협정을 그리 처리해도 되나. 무슨 불륜이라도 저지르다 걸려 비실비실 물러서는 모습 같지 않나. 비겁하거나, 무능하거나, 둔감하거나, 힘이 빠졌거나, 실무 경험 없는 사람이 컨트롤 타워에 있거나, 아니면 이 모든 게 겹쳤는지도 모른다.

 야당의 비난공세는 예상범위 내다. 그런데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은 거의 곡예운전 수준으로 야당과 같은 차선을 탔다. 원래 안보적 이익과 감정적 앙금은 분리해 다루는 게 모범답안이다. 27, 28일의 대변인 논평만 보면 새누리당도 처음엔 그런 입장이었다.

 그러다 판단이 바뀐 듯하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 이명박 정부와 한 우산을 쓰진 않겠다는 뜻일까. 정치적으론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대선 국면에서 굳이 이명박 정부와 함께 비난받는 쪽에 설 이유가 없다. 이럴 땐 야당처럼 정부를 때리는 게 최선의 방어라는 게 새누리당의 판단인 듯하다. 안보와 감정의 분리는 아무리 모범답안이라 해도 정치적으로 남는 장사는 아니다.

 지금 새누리당이 정부 편 들다간 자칫 친일로 매도될 위험도 있다. 우리 국민정서법에는 아직도 종북(從北)보다 친일의 죄질이 더 무거운 모양이다. 친일이라는 ‘주홍글자’가 새겨진 채로는 대선 국면을 돌파하기 쉽지 않다. 초민감성 인화물질인 ‘친일 프레임’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동안 종북 논란으로 얻었던 반사이익을 다 반납하고도 모자란다.

 결과적으론 새누리당이 정부를 압박해 협정을 유보시킨 모양새가 됐다. 새누리당으로선 대형 화재가 옮겨붙기 직전 서둘러 피신한 셈이다. 그래도 야당은 새누리당의 알리바이를 부정하며 공격하고 있으니 어디까지 번질지 두고 볼 일이다.

 정치권은 그렇다 치고, 국민들 가운데 일본에 돌아갈 밥상을 걷어찼으니 속이 후련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적잖을 거다. 이게 정신건강에야 좋을지 모르겠으나, 과연 우리 안보에 도움이 되는지는 냉정하게 따져볼 문제다. 한국으로선 25번째인 이번 협정을 가리켜 안보주권 포기, 제2의 을사늑약이라며 거품을 무는 분들도 있다. 그럼 우리는 그동안 24번이나 안보주권을 팽개쳤고, 24번이나 을사늑약 수준의 굴욕협정을 맺었단 말인가. 정말 그랬다면 나라가 남아났을 리 있겠나.

 이번 협정은 본격적인 군사협력이 아니다. 낮은 수준의 협력이라고 보면 된다. 한·일 사이에 ‘안보 그물망’ 하나 더 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재무장을 도울 수 있다는 마이너스 효과와 대북 억지력을 높이는 플러스 효과를 냉철히 따져 협력의 수준을 정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를 제대로 납득시키지 못한 정부, 그리고 이를 당리당략에 이용하려는 정치의 책임이 크다. 결국 내치의 잘못이다.

 2005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를 예방한 일본 의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양 국민들 간의 감정대립으로 증폭되지 않도록 정치 지도자들이 절제된 대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어떤가. 양국의 감정적 앙금을 불쏘시개 삼아 안팎에서 갈등의 불을 훨훨 태우고 있진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