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백열과 냉혹한 눈보라, 동시에 휘몰아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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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호 14면

19일 오후 850석 규모의 강동아트센터 무대 위에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RNO) 단원 77명이 자리했다. 이어 지휘자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등장했다. 피아니스트로 더 유명하던 시절의 날렵한 모습은 간데없고, 한눈에 배가 많이 나온 지휘자의 외양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자아냈다.그러나 그르렁대는 현악기와 목관악기들이 소용돌이치는 도입부에서부터 청중은 자리에 얼어붙은 듯 눈앞에 펼쳐진 폭풍우 치는 바닷가의 회색 풍경을 바라보았다. 모음곡 ‘중세 시대로부터’ Op.79는 글라주노프가 1902년 작곡한, 음악으로 그린 4폭의 회화다. 목관악기의 적극적인 활약이 돋보인, 바다의 풍랑을 그린 ‘전주곡’에 이어 ‘스케르초’에서는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등 여러 작품에서 들을 수 있는 ‘진노의 날’ 주제가 등장했다. ‘음유시인의 세레나데’에서는 고즈넉한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연속되는 하프 연주와 잘 어우러졌고, 장엄한 관현악의 행진이 이어지는 ‘피날레’에서는 팀파니의 연타와 금관 악기의 포효가 청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미하일 플레트네프 지휘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19일 서울 강동아트센터

30분 넘는 첫 곡이 끝나고 피아노가 무대 중간에 놓였다. 피아니스트 조성진(18)이 플레트네프와 함께 등장했다. 플레트네프는 1978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자신이 직접 피아노 연주용으로 편곡한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 33년 뒤인 2011년, 같은 대회에서 3위에 입상한 조성진과 처음으로 협연하는 작품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2008년 모스크바 청소년 쇼팽콩쿠르 우승자이며 오는 9월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유학해 미셸 베로프에게 배울 예정인 예비 프랑스 유학파다운 레퍼토리였다.

조성진의 타건에서 흘러나오는 음의 알맹이는 작고 단단했으며 반짝였다. 섬세한 쇼팽이었다. 2악장의 감수성 촉촉한 표현에서 20대를 앞둔 이 청년이 예전보다 더욱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관현악법보다는 피아노에 정통한 쇼팽이었기 때문에 쇼팽 협주곡의 반주는 오케스트라 사이의 차이점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플레트네프와 RNO의 반주는 개성이 두드러졌다. 단순히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맞춰준다기보다는 독립적인 자신들의 지분을 확보한 듯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관현악의 밀물과 썰물의 수위를 정교하게 제어해 나갔다. 1악장의 마지막 부분이나 3악장의 끝 부분에서 조성진은 거센 파도 위에 사뿐히 올라타는 서퍼의 타이밍을 놓치곤 했다. 조성진은 리스트 ‘사랑의 꿈’ 3번을 앙코르로 선사했다. 애틋하면서도 낭만적인 루바토는 어쩐지 고국의 팬들에게 보내는 작별인사처럼 다가왔다.

2부의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모음곡은 이날 연주회의 백미였다. 차이콥스키의 익숙한 관현악을 플레트네프가 직접 편곡한 악보를 연주한 이들은 우아함과 격렬함, 뜨거움과 차가움이라는 대조적인 극한을 보여주며 러시아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서의 RNO의 위상을 분명히 했다. 플레트네프는 절제된 동작으로 경제적인 지휘를 했다. 오케스트라의 평소 축적된 훈련량이 상당해야 가능한 지휘였다. 플레트네프의 손짓이 간단히 크레셴도를 요구하면 오케스트라의 총주는 오디오의 볼륨을 단숨에 3시 방향으로 올리는 듯 거침없는 음량을 토해내며 귓전을 때렸다.

강렬하고 선명한 폭풍으로 각인되는 이들의 연주에는 강동아트센터의 어쿠스틱도 일조했다. 약간의 건조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모든 악기의 결을 단단하게 모아주고, 트라이앵글 소리 하나도 뚜렷하게 들리는, 애매하지 않은 음향이었다. 거꾸로 앙상블이 매끄럽지 못하면 청중 앞에 아무런 여과 없이 드러날 수 있기에 연주가에겐 공포의 홀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플레트네프와 RNO는 앙코르로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중 ‘트레팍’을 선사했다. ‘백조의 호수’가 던져준 강렬함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청중에게 도수 낮은 술처럼 다가왔다. 플레트네프와 RNO는 3년 전 내한했을 때보다 한결 안정되고 성숙한 모습이었다. RNO는 그동안 개인적인 아픔을 겪은 지휘자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오랜 친구 같았다.

루바토(rubato)이탈리아어로 ‘숨겨진’이라는 뜻이다. 템포 루바토(tempo rubato)의 준말로, 연주할 때 기본 템포를 변화시키지 않고 한 악구 중 각 음표의 길이를 탄력 있게 가져가는 방법. 템포의 변화가 주는 긴장감으로 선율에 표정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즉흥적인 요소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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