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다시 읽기] '어리석음을 찬양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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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개혁이냐, 언론 탄압이냐. 논란이 분분하다. 전직 대통령이 낸 회고록에 대해 청와대는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대학이나 기업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이들이 간혹 있더니 이제는 아버지가 일하던 교회를 아들에게 대물림해 주는 교회도 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허영과 명예, 욕심과 어리석음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진실과 사랑, 지성과 현명 따위는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이 되어버린 듯 하다.

에라스무스(1469~1536) 의 '어리석음을 찬양함'(1509년) 은 인간사의 이러한 면을 풍자한 작품이다. 그에 따르면 어리석음은 '생명의 씨앗이자 샘' 이다.

어리석음 없이 어찌 남녀가 몸을 섞고 어리석음 없이 어찌 해산의 고통을 치른 뒤 또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는가.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지혜보다는 어리석음이 훨씬 효과적이다.

바보같은 수작과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야 정치를 할 수 있다. 영웅들의 고귀한 행위, 수많은 찬란한 글, 도시.제국.사법행정.종교.학문과 예술.인간의 계획과 판단, 이 모든 것들이 어리석음과 허영, 광기 때문에 유지된다.

어리석음 때문에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즐긴다. 어리석음은 유한한 삶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또 한 종류의 어리석음은 똑똑한 척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이다. 아내가 수많은 정부를 가졌는데도 마치 정숙한 것처럼 생각하는 남편들, 사냥에 미쳐 날뛰는 귀족들, 노름꾼들, 거짓말쟁이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해 면죄부를 받았다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성인 숭배자들, 8품사에 매달린 문법학자들, 자기사랑과 아첨에 사로잡힌 시인들, 문필가들, 법률 조문만 쌓아올리는 법률학자들, 논리학자들, 수사학자들,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개념을 입에 담는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삭발의 넓이는 몇 치이고 수면은 몇 시간을 취해야 하는가 등에 집착하는 수도사들, 군주와 제후들, 교황과 추기경, 주교들, 이 모두가 똑똑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의 부류에 들어간다.

에라스무스가 찬양한 어리석음은 진정한 겸손과 사랑에 바탕을 둔 복음적 어리석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지혜있는 자들이나 힘있는 자들, 가진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여자들과 어부들을 가까이 한 것, 짐승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당나귀를 고르신 것, 성령이 독수리의 모습이 아니라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 온 것,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양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어린양이라고 부르게 한 것은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높이 인정한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참된 지혜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인다.

에라스무스의 전기를 쓴 네덜란드의 사학자 요한 호이징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음을 찬양함'은 탁월한 작품이다. 학문적으로나 경건한 면에서나 이보다 훨씬 더 뛰어날 뿐 아니라 아마도 영향을 크게 미친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때가 있었다. '어리석음을 찬양함'은 불후의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유머가 넘칠 때 그 특유의 정신적 깊이를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에라스무스는 그가 아니면 아무도 줄 수 없는 것을 세상에 주고 갔다. "

많은 사람들은 에라스무스하면 아직도 '우신예찬(愚神禮讚) '을 기억할 것이다. 역사시간을 통해 우리는 이 책 이름을 이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우리말로는 '광우예찬(狂愚禮讚) '(정기수 옮김, 을유문화사) 이란 제목으로 번역이 나와 있다. 이것이 우리말 번역으로는 유일하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서점에서 살 수 있다. 라틴어 원본을 바탕으로 한 좀 더 읽기 쉬운 번역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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