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가격 매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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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유료화는 잘못된 벤처정신이며, 위험을 무릅쓰고 밀어붙인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가 기꺼이 가격을 지불할 수 있을 정도로 ‘지각된 가치’가 있는 콘텐츠나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유료화가 가능한 것이다.

최근 인터넷 기업들이 앞 다투어 콘텐츠 유료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수익 창출의 절박함에 기인한다. 지난 1∼2년 동안 많은 인터넷 기업들이 투자 유치 중심의 머니 게임을 했다면, 이제는 매출 중심의 마케팅 게임으로 제자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회원 수라는 정량적인 게임에서 회원의 총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질적인 게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환은 내실 있는 경영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현상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콘텐츠의 유료화는 사실 기업 생존을 위해, 많은 인터넷 기업들이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앞당겨 할 수 없이 실시하는 양상을 보이는 듯하다.

창업 초기에 신봉해 왔던 ‘회원 수=사이트의 가치=광고수익 보장 + 전자상거래 수익보장’이라는 등식이 깨지면서 광고나 전자상거래 수익 대신 콘텐츠의 유료화를 택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문제는 콘텐츠에 가격을 매기기만 하면 매출이 저절로 발생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사용한 정보나 서비스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논리는 일반적으로 맞다. 그러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정보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대안이 많다면 모두 그 사이트로 옮겨 갈 것이 뻔하다. 설사 국내 업체들끼리 일종의 담합을 한다 하더라도 해외의 많은 사이트들이 무료로 좋은 정보를 제공한다면 그 영향력은 약화될 것이다.

콘텐츠의 유료화를 추진하는 인터넷 기업들은, 소비자의 파워가 인터넷 때문에 훨씬 강해지고 있고, 결국에는 기업 파워와의 경쟁에서 소비자들이 우위에 설 날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결국 기업이 가격을 매기는 대로 힘없이 끌려 왔던 전통적 오프라인 마케팅과는 다른 양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콘텐츠 유료화의 성공 여부는 막강한 인터넷 소비자들을 어떻게 설득하여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사용했으니 당연히 지불해야 한다는 당위성이나, 유료화 대세 논리나, 인터넷 벤처기업 살리기 같은 애국심 논리 같은 것은 너무나도 미약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무형의 정보에 대한 가치는 매우 낮게 평가하거나 무료로 얻을 수 있는 정도로 인식되어 있어서 가치관적 저항도 뚫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관통할 수 있는 방법은 정통 마케팅 접근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실제로 간과하기 쉬운 성공의 열쇠는, 소비자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이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 가격전략에 달려 있다.

콘텐츠에 대한 기대치와 실제 평가와의 갭은 얼마나 되는지, 소비자의 최대 지불 의향 가격은 얼마인지, 묶음가격(price bundling)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은 어떠할 것인지 등과 같은 많은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한 가격일 때 비로소 소비자들의 저항을 극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가 있는 콘텐츠나 서비스에는 당연히 그 지각된 가치만큼의 가격을 소비자들은 지불할 용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기업이 평가하는 콘텐츠의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소비자들이 평가하는 ‘지각된 가치’에 달려 있다.

최근 국내의 한 기업이 일본에서 한 연구보고서를 구입하고자 했는데 약 2백 쪽 정도 되는 그 보고서 한 권을 얻기 위해 1천만원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치 있는 정보는 고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구매한다는 좋은 예다. 인터넷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꺼이 가격을 지불할 수 있을 정도로 ‘지각된 가치’가 있는 콘텐츠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최근에 나온 정보상품 가격관련 이론 중에서 버전전략(versioning)이란 것이 있다. 처음 그 상품을 출시할 때는 무료 또는 초저가로 판매하고, 점차 그 상품이나 서비스에 익숙해져 더 상급품을 원할 때 그 상급품에 고가의 가격을 책정하는 방법이다.

이때의 가격 책정은 ‘원가+마진’ 방식이 아닌 고도로 분석된 소비자의 ‘지각된 가치’에 의해 결정한다. 인터넷 기업의 가격책정에 적절히 활용될 수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콘텐츠의 유료화는 잘못된 벤처정신이며 위험을 무릅쓰고 밀어붙인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렵게 구축해 놓은 회원들마저 떠나가는 더 근본적인 문제만 야기할지 모른다. 철저한 소비자 이해를 바탕으로 한 빈틈없는 전략을 시의적절하게 구사해 시장이 호응할 때만 비로소 유료화는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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