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평가와 역사적 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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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짓기 위해 10만 명의 인원이 10년 동안 일해야 했다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죄수 70만 명의 피와 땀이 들어간 중국의 시황릉,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그것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보고 고대인들의 화려한 문화와 예술에 감탄한다. 역사란 참 묘한 것이다.

한때 세계경영이라는 모토로 하버드 대학의 연구 과제가 되었고 영국 이코노미스트 지에 세계적 경영인으로 꼽혔다던 기업인이 지금은 나라를 망친 죄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같은 시기에 같이 나라를 망친 전직 대통령은 대담하게도 "나의 업적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평가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는 사뭇 다른 경우가 많다. 도대체 역사에서 평가란 뭘까? 역사 전체를 관류하는 일관된 가치란 없는 걸까?

그에 대해 '역사철학 강의'에서 헤겔은 '발전'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인류 역사가 지속적으로 발전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본다. 과거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누렸던 자유가 점차 다수의 사람들에게로 확장되어가고 있다는 게 그런 사례다.

서양 철학에서 헤겔은 하나의 '거대한 풀(pool)'이다. 헤겔 이전의 모든 철학은 헤겔이라는 풀로 고여들었고, 헤겔 이후의 모든 철학은 그 풀로부터 발원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말에는 다소 과장이 있지만, 헤겔이 당대 철학을 집대성했고 또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실제로 헤겔은 스스로 자신에게서 철학은 끝났으며 더 이상 새로운 철학은 없다고 단언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몰라도 헤겔만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단순한 시건방이 아니라 나름대로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 근거는 사실 간단하다.

법칙을 파악하면 현상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중력의 법칙을 알고 있으면 물이 높은 데서 떨어지든,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든 모든 낙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철학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믿은 헤겔은 자신이 철학의 종착역에 이르렀다고 여긴 것이다. 철학은 이제 끝났다!

'역사철학 강의'는 역사의 '발전' 개념과 철학의 '법칙' 개념을 종합한다. 역사가 발전한다면 거기에는 법칙이 있고 방향이 있다는 얘기다. 역사가 반복되거나 순환하는 것이라면 발전이 없을 테니까. 그럼 역사의 방향은 어딜까? 헤겔에 따르면 그건 '정신'(혹은 '이념')이다.

"발전의 원리는 그 근저에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내적 규정이 스스로 전개하여 현실적 존재가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 형식적인 규정은 바로 정신이다. 정신은 역사를 자신의 무대, 자신의 소유, 자기 실현을 위한 장소로 삼는다. 정신은 결코 우연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규정적인 것이며, 오히려 우연성을 직접 사용하며 지배한다."

이 알쏭달쏭한 말을 풀이하자면 이렇다. 발전이란 모종의 내적 요인이 현실의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데, 그 내적 요인이란 바로 정신이다. 정신은 필연적이며 법칙적인 것이며, 역사의 발전이란 정신이 스스로 발현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정신은 곧 역사의 방향이자 출발점이 된다. 이런 정신을 가리켜 헤겔은 세계정신 또는 시대정신이라고 부른다.

현실의 역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동양의 역사도 있고, 서양의 역사도 있으며, 아프리카의 역사도 있고, 신대륙의 역사도 있다(헤겔 자신은 세계사를 동양, 그리스, 로마, 게르만의 네 가지로 구분한다). 이 다양한 역사들을 관통하는 게 세계정신이다. 겉으로는 다양해 보이고 서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역사도 모두 하나의 세계정신이 스스로 전개된 결과라는 점에서는 같다.

역사 속의 인물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나폴레옹 등 역사에서 분명한 위치를 지니고 당대의 역사를 이끌어나갔던 인물들도 실은 세계정신이 부여한 각각의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 세계정신이 연출자라면, 역사의 인물들은 좋게 말해서 배우이고 나쁘게 말하면 꼭두각시일 뿐이다(후대에 평가를 맡긴 전직 대통령은 누구의 꼭두각시였을까?).

그럼 헤겔이 현실의 다양한 역사와 다양한 인물을 어떻게 단일하고 동질적인 세계정신에 통합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세계정신과 현실 역사의 관계는 동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관하지도 않다. 우선 세계정신이 없다면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부모 없는 자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세계정신은 역사를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부모는 자식을 통해 스스로를 구현한다). 말하자면 세계정신은 역사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며, 역사는 세계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이것이 이른바 변증법적 관계다.

사실 이런 목적론을 취한다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모든 게 세계정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역사를 지배하는 게 세계정신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것은 신과 같은 개념이다. 이처럼 종교적 구도를 도입함으로써 헤겔은 역사와 철학의 종착역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더 이상의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죽고 나서도 역사는 계속 진행되었으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그가 역사와 철학을 '완성'했기에 그 이후의 역사가와 철학자들은 모두 헤겔을 부정하는 것으로 출발점을 삼았다(종착역에 닿았으면 새로 출발해야 하니까). 혹시 헤겔은 그런 현상마저 세계정신이 자기 실현을 이루어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보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역사에서 모든 평가는 끊임없이 유보될 수밖에 없는 걸까? 역사 전체로 보면 아주 짧은 기간인 불과 몇 년의 시차를 두고 한 기업인과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극적으로 바뀌는 현실이 어이없기에 하는 말이다.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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