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9)

중앙일보

입력

9. 외환 자유화 조치

외환위기 당시 외환 자유화 조치를 취하게 된 데는 남덕우(南悳祐) 전 총리의 공이 컸다.

어느 날 그와 점심을 먹으며 나는 "외자유치를 하기 위해서는 외환관리를 풀어야 한다" 고 말했다.

그날 오후 기자회견에서 그가 "외환 자유화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고 말했다. 백만원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1998년 3월 이규성(李揆成) 재정경제부장관이 발령을 받고 난 다음날 나는 그와 저녁을 먹으며 "외환자유화는 국제수지가 나쁠 때 해야 한다" 고 강력히 주장했다.

"외환자유화는 국제수지가 나쁠 때 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아니, 달러 들어오는 걸 막는 외환관리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도 동감을 표시했다. 나는 우리도 이제 외환을 풀어 놔도 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후 워싱턴에 간 李장관이 외환관리법을 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1만달러 이상 들여올 때 하게 돼 있던 신고 의무가 없어지게 됐다. 1970년대 우리나라가 첫 외환자유화 조치를 취한 것도 사실 오일 쇼크의 한 가운데서였다.

외환자유화 조치는 나중에 비상경제대책위원회 보고서에도 수록됐다. 이 보고서엔 외환자유화 조치 말고도 내가 내놓은 두 가지 제안이 담겼다.

하나는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를 넘어서는(beyond IMF)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니 IMF보다 외국계 투자은행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더 문제였다. 이 점에 대해선 장재식(張在植) 비대위 위원(현 자민련 의원)이 적극적으로 찬성의 뜻을 밝혔다.

다른 하나는 한국을 동북아 경제권의 허브로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나는 비대위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학자들을 상대로 이같은 정책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내가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이들 학자의 요구로 이 제안들은 비대위 보고서에 실리게 됐다.

98년 6월 미국을 공식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뉴욕증권거래소를 찾아 증시 개장을 알리는 벨을 눌렀다.

월가로부터 환대를 받은 것이다. 당시 대한생명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생명으로부터 10억달러를 유치했다고 발표했다.

金대통령의 방미 성과 리스트에도 올라 있던 이 건과 관련해 나는 투자 규모가 7억~10억달러선이 될 것이라고 들었다.

이 투자유치건은 그러나 무산되고 말았다. 외자유치도 파트너가 있는 게임이다. 성사시키기 위해 때로는 양보가 필요하다.

98년 8월 31일 나는 남덕우 전 총리 등과 함께 강경식(姜慶植) 전 부총리와 김인호(金仁浩) 전 경제수석에 대한 보석 허가와 선처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담당재판부에 냈다.

경제부처 전직 장.차관급 관료 45명이 서명한 이 탄원서에 나는 두번째로 사인했다.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직전까지 현직에 있었던 이들 두 사람에게 외환위기와 관련해 형사책임을 물은 것은 지나쳤다는 생각이다. 물론 책임을 지는 사람은 있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 시험에 붙어 장단군수 등 공직에 몸담았고 훗날 대한수리조합연합회장을 지낸 나의 아버지 정민조(鄭民朝)는 "윗사람의 역할은 책임을 지는 것" 이라고 가르쳤다.

높은 사람에게 큰 책상에 좋은 차, 고액의 봉급을 주는 것은 이 '책임 장사(責任商賣)' 를 잘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강경식.김인호 두 사람은 현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이미 경제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졌다.

우리가 겪은 외환위기를 사람들은 흔히 IMF 사태라고 부른다. IMF 사람들은 이런 우리의 인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긴급 자금 지원을 요청한 쪽은 한국이고, IMF는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을 도왔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 수단이 IMF프로그램이라는 얘기다. 옳은 말이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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