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촬영·편집 혼자서 '수중다큐 VJ 장원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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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 다큐멘터리 전문 PD인 장원준(46)씨와 얘기하던 중 문득 조용필이 노래한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 떠올랐다. 노래 가사에 이런 부분이 있다.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장씨는 인터뷰 중간에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묻지 마세요. 왜 그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가려 하는지 말입니다. 제가 살아있다는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

장씨는 노랫말의 표범과 달리 산정(山頂)이 아닌 심해(深海)를 찾아간다. '고독한' 표범과 달리 그만의 일이 있어 "즐겁다" 고 말했다. 불혹을 훨씬 넘은 나이지만 이제야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서울에서 과천을 지나 인덕원 네거리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37평 크기의 보통 아파트다. 그러나 내부는 여염집과 전혀 달랐다.

우선 거실부터 온갖 방송장비로 가득했다.작은 방송사 스튜디오를 연상시킨다. 대당 1억원이 넘는 디지털 편집기가 두 대, 일반 아날로그용 편집기, 음향 조절기, 자막 처리기, 수중 특수카메라, 6㎜ 디지털 카메라 등. 모두 합해 시가로 7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송출시설만 없는 미니 방송국이다.

부엌.안방에도 그가 지금까지 찍었던 비디오 테이프들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대략 5백여개. 대부분 해양 생물.생태를 기록한 것들이다. 책꽂이에서도 수중동물.해조류.조개류.민물고기 등 온통 물과 관련된 책만 보인다.

그는 지난해 12월 초 현재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서울 양재동에 있던 사무실을 처분하고 일체의 방송장비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집과 사무실을 왕복하는 이동시간을 줄여 자신의 작업에 전념하려는 뜻에서였다. 결과적으로 훌륭한 판단이었다고 자평한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지요." 장씨는 국내 방송가에서 거의 유일한 수중전문 다큐멘터리 PD로 통한다. 그렇다고 특정 방송사에 소속된 몸은 아니다. 통상 주변 눈치를 봐야 하는 방송사 분위기가 싫고, 소재 선정.촬영.편집 등 프로그램 제작 전과정을 혼자 꾸려가는 것이 마음에 들어 이 길을 택했다. 최근 방송가의 '뉴 파워' 로 떠오른 비디오 저널리스트(VJ)의 전형이다.

연초 SBS에서 신년 특집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문어의 모정' 을 보면 그의 집요한 탐구정신이 엿보인다. 이 프로그램은 2㎜ 정도의 작은 알에서 문어가 부화하는 모습, 그 알들을 보호하려는 어미 문어의 지극한 정성을 담아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장씨 자신이 청계천에서 돋보기를 사다가 수중용 확대 카메라를 만들기도 했다. 특히 50여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자식을 지켜내고 자신은 결국 죽고 마는 어미 문어의 모습은 감동 자체였다. 그는 여담으로 "이제 절대 문어는 먹지 못하겠다" 고 털어놓았다.

장씨는 이 프로그램을 위해 지난 2년을 고스란히 투자했다. 제주도 서귀포 앞바다에서 숙식하며 문어의 일생을 고스란히 낚아챘다.

그간 다이빙한 횟수만 8백여회. 맨 땅에 헤딩하듯 바닷속을 뒤졌다. 그는 "미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제주 해저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됐어요" 라며 활짝 웃었다.

장씨가 바다를 평생의 친구로 택해 1인 다큐멘터리 PD로 홀로 선 것은 1998년. 그해 6월 조개양식장의 황폐화 원인을 짚은 '불가사리의 반란' 과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바다에 수장된 한국인 징용자의 흔적을 더듬은 8.15 특집 '트럭섬의 비밀' 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이밖에도 SBS '출발 모닝 와이드' 시간을 통해 국내외 바닷속 비경과 생물의 생태를 줄기차게 소개했다. 그동안 찾아간 나라만 25개국. 조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요즘 VJ의 활동이 왕성하지만 전문성은 부족한 편입니다. 방송사의 하청 비슷한 일을 하죠. 그래선 비전이 없습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영역을 발굴해 온몸을 던지는 열정이 필수죠. "

장씨는 사실 오래 전부터 오늘을 준비해왔다. 현대.삼성코닝 등의 대기업에서 영상물을 만들었으며 1991년엔 회사를 차려 각종 홍보물을 납품해왔다. 그러다가 홀로 설 수 있는 경제적 밑바탕을 마련한 98년 모든 것을 접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공기탱크를 멜 수 있는 힘이, 아니 걸을 수 있는 힘만 있다면 바다와 함께 할 겁니다." 다음 계획은 제주도 바다의 사계를 영상에 담는 것. 초.중.고생을 위한 교육용 해양비디오 제작이 가장 큰 소망이다.

"보세요, 5년 안에 반드시 해낼 겁니다. 파면 팔수록 신비한 게 바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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