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식 커밍아웃 …‘비핵화’ 거짓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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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에서 북한 병사들이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개정 헌법에 ‘핵 보유국’을 명기하고 이를 공개한 것은 국제사회를 향한 ‘활자 도발’이다. 20여 년 전 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핵 협상 테이블에서 써온 가면을 벗고 핵 보유 국가로서 핵무기를 축적하면서 미국과 핵군축 협상을 해나가겠다는 게 북한의 전략이다.

 북한은 또 그동안 이어졌던 모든 협상의 근본을 흔들었다. 1992년 발효된 남북 비핵화 선언,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 2007년 10·3 북·미 합의, 한 달 전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종이 조각이 된 2·29 베이징 합의 등….

 그동안 북한은 협상 테이블에서 “조선반도 비핵화는 위대한 김일성 수령의 유훈”이라고 강조했다. 수령의 뜻인 만큼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니 자신들의 진정성은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국내외 일부 인사들도 “북한의 뜻이 이러하니 미국과 국제사회가 대북 보상을 적극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북한은 헌법에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과 김정일의 ‘핵 보유 업적’이란 모순을 그대로 드러냈다. 북핵 협상에 정통한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의구심을 가진 상태에서 ‘북한의 도발→보상과 대화→도발’이란 악순환을 계속해 왔다”며 “북한의 헌법 명기로 북핵 협상장에서의 ‘불편한 진실’이 껍질을 벗게 됐다”고 말했다. 또 전성훈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에 핵 포기를 요구하는 것은 북한의 근본을 해치겠다는 얘기가 될 것”이라며 “북한이 최고의 카드를 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북 정책의 전면적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핵폭탄 수를 축적해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며 “북한 핵 문제 접근은 레짐 체인지를 통해 ‘핵이 필요하지 않은 정권’ 차원의 정책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북한의 진정성·신뢰는 이번 헌법 개정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어떤 명분을 내세워 대화에 나오더라도 재개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비핵화 사전조치 수준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6자회담 폐기론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외교 소식통은 “외교가 분위기는 ‘아직도 6자회담 얘기하세요’란 말이 나올 정도”라며 “중국도 더 이상 6자회담을 열고 보자는 말을 하진 않는다”고 했다. 여기엔 북한이 6자회담을 핵 보유국 공식화를 위한 회의로 활용하려 한다는 우려도 깔려 있다. 지난달 본지가 탈북자로부터 입수해 공개한 ‘김정일 유언’엔 “6자회담을 우리의 핵을 없애는 회의가 아니라 우리의 핵을 인정하고 핵 보유를 전 세계에 공식화하는 회의로 만들어야 하며 제재를 푸는 회의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이 있다. 올 연말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 선거, 중국의 정권 교체 등을 앞두고 한반도 정세는 경색 국면을 탈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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