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장진호서 찾아 … 이역만리 하와이 갔다 고국품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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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이 확인된 고 이갑수 일병의 딸 이숙자씨와 아들 이영찬씨가 25일 서울 국립현충원 내 국군유해발굴단 사무실에서 고인의 영정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국방일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고 자랑도 하지 않았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이 발굴한 한 무명 학도병 전사자의 일기 한 대목이다. 25일 고국 품으로 돌아온 12구의 국군 전사자의 사연은 이 일기만큼이나 애절하다. 이들은 62년을 북한과 미국 에서 보낸 뒤에야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들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입대해 미 7사단 소속의 카투사에 배속됐다.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 이들은 모두 중공군 8개 사단에 포위된 채 탈출로를 뚫기 위해 2주간의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이후 50년이 넘도록 이들은 북한 땅에 묻혀 있었다.

 이들의 유해가 수습된 것은 2000~2004년 북·미 간 미군 유해 발굴 합의에 따라 장진호 지역 발굴이 이뤄지면서다. 당시 미국은 북한과 합동으로 장진호 지역을 샅샅이 뒤졌고, 2005년까지 226구를 발굴했다. 처음엔 모두 미군으로 오인돼 하와이 미 합동전쟁포로실종자사령부(JPAC)로 옮겨졌다. 10여 년간은 미군으로 모셔졌던 것이다. 그러다 유전자(DNA) 감식 등 JPAC의 신원 확인 과정에서 동양인으로 판명됐다. JPAC는 지난해 8월 우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이를 알려왔고, 이때부터 한·미 공조체제가 가동됐다. 유해발굴감식단 요원과 미 JPAC 전문가들이 두 차례씩 서울과 하와이를 방문해 분석했다. 12구의 유해에서 유전자를 채취한 국방부는 전사자 유해 확인을 위한 유가족 DNA 표본과 대조작업에 나선 끝에 김용수·이갑수 일병의 신원을 확인했다.

 김 일병의 경우 지난해 숨진 형이 생전에 동생의 유해를 찾겠다며 DNA 감식용 혈액을 국방부에 제공한 게 신원 확인의 결정적 단서가 됐다. 이 일병은 유해와 인식표가 함께 나와 신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병의 유해는 일부만 봉환됐다. 정부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최고로 예우하기 위해 지난 18일 조철규 육군준장을 단장으로 하는 유해 인수단을 하와이에 보냈다. 유해를 공수할 우리 공군의 C-130 특별수송기도 준비했다.

 1933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 일병은 18세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해 미 7사단에 배속돼 북진했다 전사했다. 그의 아버지 고(故) 김인주 선생도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투신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날 부산에 거주하는 큰조카 김해승(55)씨가 그의 유해를 맞았다. 김씨는 “기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191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이 일병은 34세에 전장에 뛰어들었다. 사병으로 입대하기엔 적잖은 나이였다. 당시 아내와 7살, 4살이던 남매를 남겨두고서다. 이숙자(69)·영찬(66) 남매는 백발이 돼서야 아버지를 맞이했다. 영찬씨는 “빨리 통일이 돼 아버지의 나머지 유해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경색된 남북관계에 가로막혀 북한지역의 국군 유해 발굴 협상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학도병 전사자의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내 살던 나라여, 내 젊음을 받아주오! 나 역시 이렇게 적을 맞아 쓰러짐은 후배들의 아름다운 날을 위함이니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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